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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의 막전막후] 내몰리는 인간군상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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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의 막전막후] 내몰리는 인간군상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

입력
2006.06.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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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에게 말하지요. 귀 끝까지 달려가서 들어 봐. 눈 끝까지 달려가서 바라 봐.”(‘검둥이와 개들의 싸움’ 중 흑인 알부리의 대사)

작가란 우리를 대신해 귀 끝까지 달려가서 생의 비밀을 들은 자, 눈 끝까지 달려가서 세계의 심연을 본 자인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1989년 에이즈를 앓다가 마흔 둘의 나이로 요절한 프랑스 작가. 그는 이십대에 러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미국 등을 여행하며 노동자 계급의 출구 없는 삶, 거래를 위한 언어 교환 말고는 더 이상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 상황을 목도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이란 영역 싸움을 하는 동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계급을 구성하는 원리다.

극단 76단의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사진)은 백인 자본이 소유한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폐쇄 직전의 공사장에서 벌어지는 이주 노동자인 백인과 정주민인 흑인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흑인의 영역을 침범한 백인들은 확보한 식민지를 고수하기 위해 늘 날이 서 있다.(김낙형 연출, 6월18일까지 블랙박스씨어터)

곧 일터를 잃게 될 백인 칼은 사막의 재칼처럼 으르렁거리고(윤상화), 소장 오른은 때늦은 혼인식을 통해 상징적으로 제 영역을 표시하고 떠나고자 한다(윤제문). 삶에 지친 독일계 프랑스 이민 노동자 레온은 늙은 숫사자의 영역에 의탁하려고 기어든 암사자처럼 절박하다(김성미). 여기에 초식 동물 누우 같은 흑인 알부리가 백인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죽은 제 동족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 그는 그림자처럼 그들 주변을 서성댄다(성홍일). 마치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을 찍은 자연 다큐에 가까운 풍경이다. 이를 콜테스는 카메라를 대신해, 치밀한 언어로 따라간다.

그러나 이 세밀화에 가까운 작가의 언어 구사 능력에 극 구조는 자주 가려진다. 이번 공연도 언어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언어에 의해 지연되는 인물들의 행동과 선택을, 연극은 수동적으로 따라 가고만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래를 위한 언어 교환에 그칠지라도 소통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외로움에 공감하기엔 충분하다.

20세기가 남긴 제국주의의 잔해와 식민지의 삶의 그늘을 콜테스의 연극은 그리고 있지만, 외려 신자유주의 하에 노동 시장의 세계적인 이동 속에서 더 이상 자기 영역을 고수할 수 없게 내몰린 오늘날 인간 상황을 예언하고 있다. 더 이상은 자신이 속한 세상의 정주민으로 살 수 없는 우리들….

부르주아 계급은 도덕적 황폐함에 매몰되어 삶의 지향을 잃고 있고, 노동자 계급은 빠져 나올 수 없는 노동의 피로 속에서 고향을 잃어 가고 있는 중이다. 콜테스의 전언이다.

극작ㆍ연극 평론가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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