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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종교 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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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종교 공생

입력
2006.06.09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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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최고 라비(유대교 지도자) 조나단 색스는 "만약 종교가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 없다면, 종교는 확실히 문제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역사적 경험이나 현재의 상황으로 보아 불행히도 그의 지적은 진실에 가깝다.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든, 자연의 우연한 일부로 보든 오늘날 인간과 다른 동물을 가르던 많은 경계는 점차 무너지고 있다. 도구나 언어, 심지어 영혼의 일부인 감정까지도 인간에 고유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를 가진 동물'이라는 인간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늘 종교와 함께 살아왔다.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가 안고 있는 불안 때문이다. 인간의 삶이 탄생과 죽음이라는 절대적 경계 사이에 불완전하게 자리잡은 데서 비롯한 원초적 불안은 인간이 겪게 되는 현실적 불안에 의해 증폭된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한다.

그런 자유가 평화를 준다. 인간 안으로부터의 이런 평화야말로 오래 지속되며, 존재 바깥의 사회ㆍ국제적 평화의 바탕이 된다. 따라서 안으로부터의 평화를 겨냥하는 종교는 당연히 밖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

■모든 종교의 중심에 평화가 있고, 모든 종교 창시자의 가르침의 중심에도 평화가 있다. 그런데도 역사는 종교가 갈등과 충돌, 폭력의 중요한 요인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종교적 신념의 강고함은 이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을 정당화했고, 종교 강요는 이민족 지배의 완성형으로 여겨졌다.

종교가 다른 요인, 예컨대 종교적 권위를 가장한 세속의 권력에 이용됨으로써 나타난 부작용이라고 여길 수만도 없다. 다른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종교적 신념도 자기절제를 잊으면 쉽사리 배타적 폭력성을 띠게 마련이다.

■8일 서울에서 개막한 '세계종교지도자 대회'는 이런 부작용을 직시하고, 종교의 출발점인 평화와 사랑을 확인하려는 자리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주최로 14일까지 열리는 이 대회에는 해외 17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지도자 20여명이 참가했다.

국내에서는 불교와 가톨릭, 기독교, 유교는 물론 원불교와 천도교, 대순진리회 지도자까지 참가했다. 이들이 '평화와 화합, 지속가능성'이란 대회 주제에 걸맞은 지혜를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종교가 평화의 교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아니 서로 다른 신념체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도 시대 의 요구로 꼽히는 '똘레랑스'(관용)에 다가서는 길일 것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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