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하고, 때로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는 흔해빠진 말, 농담처럼 지혜의 샘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그런 말들은 악성 전염병이다. (…)혼란에 빠진 사람에게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마치 자신을 아는 것이 쉬운 일인 것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말한다.
매일 이 말을 뒤집어버리며 즐거워하는 잔혹한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우리는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라고 말한다. 마치 느슨하게 감겨있는 실의 끄트머리가 분명하게 드러나있어 그 끝을 계속 잡아당기기만 하면 반대편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하지만) 첫걸음은 길고 고통스럽고 느린 과정이며, 그 첫걸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89~90쪽)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동굴’(김승욱 옮김, 해냄)의 주인공 알고르는 그 첫걸음의 퍼즐 위에 서있다. 3대째 그릇만 구워온 이 늙은 도공(陶工)의 시대에 소비자들은 플라스틱 그릇만 찾는다. ‘센터’는 도시의 상품을 공급하는 거대한 독점 매장으로, 자체 주거ㆍ위락지구를 거느린 채 탐욕의 생명체처럼 제 몸집을 옆으로, 위 아래로 키우고 있는 존재. 마침내 ‘센터’는 알고르의 제품 주문을 끊는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새로운 제품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노동 없는 여생을 마칠 것인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센터’ 경비원인 사위가 곧 센터 안에 거처를 얻게 되고, 알고르는 그에게 얹혀 지낼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느 선택이든 그의 길이 센터의 논리에 포섭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 행성의 모든 무게와 질량이 중력의 지배를 받듯, 센터의 자장은 인간의 선택을 지배한다.
이쯤 되면 소설의 큰 얼개는, 1998년 노벨문학상을 탄 이 작가의 공산주의자로서의 오랜 이력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쉽사리 감지된다. 전통과 자본의 대결구도를 통한 자본주의 비판과 노동 가치의 복원, 그리고 “날이 갈수록 점점 한 조각씩 땅이 줄어드는 섬”(360쪽) 위의 사람들의 고통스럽고 안쓰러운 일상….
하지만 소설은, 센터의 이방인인 알고르가 센터 지하 동굴에서 사슬에 묶인 시체들을 발견하면서, 거대한 우화로 급선회한다. “그(죽은) 사람들은 우리야, 나, 너(딸), 마르살(사위), 센터 전체, 어쩌면 이 세상 전체일 수도 있고.”(459쪽) 왜 ‘그들’이 ‘우리’인지, 왜 ‘동굴’이 ‘세상 전체’인지 알고르는 독자들에게 설명하지 않은 채 가족과 함께 ‘센터’를 떠나 정처 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천국의 문을 열기 위해 먼저 다른 문을 닫아야 하”듯. 다시 새로운 시작, 센터의 자장 바깥으로의 ‘첫걸음’이다.
소설에는 우연히 알고르의 집을 찾아 든 길 잃은 개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있다. 길을 잃었으니 ‘로스트’(Lost)냐, 새 주인을 찾았으니 ‘파운드’(Found)냐…. 가족은 개를 ‘파운드’라 부르기로 한다. 길을 떠난 알고르 가족의 이름은 무엇이 좋을까. 과연 이들은 이 ‘플라톤의 동굴’ 같은 세상의 미아(Lost)일까, 새 세상의 발견자(Found)일까.
소설은 관찰자 시점으로 이어진다. ‘화자’는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독자들을 소설의 이야기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가 다시 이끌고 들어가기도 하고, 언어와 사물 혹은 시간에 대한 팔순 거장의 사유의 자락을 펼쳐보이기도 한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어쩌면 서사보다 더 황홀한 매력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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