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대다수 여성 직장인들이 겪고 있는 육아의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온 경제계 여성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을 초청, ‘저출산ㆍ고령화 충격 극복을 위한 여성인재의 활용’을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정부와 기업의 적극적인 노력과 함께 여성 자신의 의식 변화도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좌담회는 1일 오전 본사 12층 송현클럽에서 열렸습니다.
■ 남성중심 조직사회에서 성공을 일궈낼 수 있었던 비결은?
설금희 = 첫째는 일에 대한 열정이다. 좋은 상사를 만나 매번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주어졌다. 불행히도 모든 직장 여성들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은 기회가 주어져도 이를 감당하고 활용하지 않으려는 여성도 많다는 점이다.
윤 심 = 동감이다. 항상 “이 프로젝트, 너무 재미있지 않냐”며 동료들과 열심히 일했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몰입해 왔다. 주변의 도움도 컸는데, 아무리 전문성이 뛰어나도 동료ㆍ상사와의 관계 형성이 제대로 안되면 일을 추진하기 힘들다.
원귀정 = 입사 후 밑바닥부터 경험했다. 만삭의 몸으로 지방 돌아다니며 영업도 했다. 아무도 노하우가 없던 신규사업 런칭도 많이 맡아 봤다. 바닥부터 다져온 이런 경험이 내게는 원동력이었다. 남자와 여자, 성(性)이 다르다고 해서 성공비결까지 다를 수는 없다.
송혜자 = 회사 세운 지 13년 됐지만, 3~4년밖에 안된 것 같다. 고통에 치이고 힘들어 하기 보다는 결과에 따른 보람을 늘 생각하며 일에 몰두했다. 적어도 내가 어떤 곳에 속해있든 ‘그저 먹는 것’은 원치 않았다. 또 하나, 사람관계를 중시했는데 내가 힘들 때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 요즘 젊은 여성들의 직장관이 많이 바뀌었지만, 육아로 고통 받는 것은 여전한 것 같다. 후배들을 평가한다면?
원귀정 = 입사하면서부터 결혼과 육아, 회사를 계속 다닐 지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여자 후배들이 아직도 많다. 상당수가 1년마다 한번씩 위기에 젖어 든다. 제품 박스를 날라야 하는 현장 근무 때면 “역시, 내가 평생 몸담을 회사가 아닌 것 같아”라며 갈등 한다. 그래서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칠 때가 많다. 그러나 직장을 쉬게 되더라도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야만 복귀가 가능하다. 길게 보면서 묵묵하게 일하는 것 만큼은 남자 직원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설금희 = 원 이사가 얘기한 그런 갈등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요즘 후배들은 회사에 대해 상당한 분석과 정보를 갖고 입사하기 때문에 자신이 할 역할에 대해서도 주관이 뚜렷하다. 육아 문제를 지레 걱정하기 보다는 실력으로 성공하고 싶어한다.
윤 심 = 여성들의 회사에 대한 몰입도가 남성들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다. 남자 직원들은 경력을 쌓고 몸값을 높여, 회사 갈아탈 것을 많이 고민한다. 반면 여자 직원들은 이직률도 낮고 오히려 회사에 ‘올인’ 하는 편이다.
■ 여성들이 유난히 정보기술(IT)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는?
윤 심 = IT기업들이 본격 설립된 게 1980년대 중ㆍ후반 부터이다. 역사가 짧다. 남자든 여자든 새로 시작했고 함께 만들어왔다. 그만큼 여성들의 맨파워가 남자 못지않다는 얘기이다.
설금희 = 재무나 인사 등 관리부서에서는 조직 내 ‘파이프라인’이 엄청나다. 이런 부서에서 전통적인 ‘톱다운’ 식으로 내려오는 남성적 문화의 끈끈한 관계는 여성들에겐 아직도 유리천장이다. 그러나 IT는 기술개발과 연구가 핵심 기능이다. 상대적으로 게임의 룰이 공정하다는 얘기이다.
■ 여성인력 활용의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육아 문제이다. 본인들의 해결 노하우와 대안은?
송혜자 = 별 수 없다. 베이비시터 두고 함께 살았다. 고령화시대가 되면서 노인들도 정정해지고 있다. 이 분들을 보육과 가사 돕는 일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가정부 개념이 아니다. 새로운 직업명도 짓고, 공공기관에서 자격증도 발급하고 해서, 어엿한 직업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직장여성과 고령 인력이 상생하고, 기업이 발전하는 길이다.
원귀정 = 몇 년 전 회사에서 질 좋은 보육시설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이를 맡기겠다는 여성이 20~30%밖에 안됐다. 한국 여성들에겐 너무 완벽한 엄마가 돼야 한다는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육아에 쏟는 시간과 양육의 질이 정비례한다고 여기는 여성도 많다. 그러나 ‘완벽한 엄마 = 훌륭한 엄마’라는 콤플렉스를 깨지 않으면 육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직장에 오면 애 생각하고 집에 가서도 또 욕먹고, 이것도 저것도 못하는 상황에서 많은 여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 받기도, 집에서 좋은 엄마 되기도 힘들다. 개인적으론 내가 런칭한 브랜드가 출시되면 가장 먼저 우리 애와 애를 돌봐주시는 시어머니에?보여준다. 이것이 우리 애가 나를 통해 배우고, 우리 가족이 나를 인정해주는 비결이다.
설금희 = 한국 여성들은 아이를 일류대학 보내는 것이 엄마의 성공이라고 세뇌 받아 왔다. 그래서 직장 여성은 항상 죄인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자녀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가 삶의 주체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송 대표 제안에도 찬성하는데, 직장에 다니지 않는 고학력 여성들을 ‘홈 티처’ 등으로 적극 활용하면 좋겠다. 이 직업에 대해 브랜딩 작업을 새로 한다면, 고학력 여성들에게 또 하나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윤 심 = 기업의 근무 패턴이 바뀌어야 한다. 무조건 충성하는 문화가 아니라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문화로 만들 수 있다면 여성들이 당면한 많은 문제들이 풀릴 것이다.
■ 정부와 기업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송혜자 = 여성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115만개에 달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96%는 음식점, 미용실, 술집과 같이 부가가치가 낮은 서비스업종이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려면 노동 유연성이 개선되고, 꼭 회사에 나와서 일하지 않아도 되는 직종이 더 개발돼야 한다. 출산과 육아 문제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에 대한 재취업교육도 강화돼야 한다.
윤 심 = 신입사원보다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재취업 여성들이 많다. 기업들이 마인드를 바꿔 경력이 있는 기혼 여성들을 뽑고 교육하는데 투자해야 한다. 남자 직원들을 보면 애인과 부인은 잘 다루면서 여성 상사, 여성 동료들과는 어떻게 함께 일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자기 조직은 물론 상대해야 할 다른 기업의 파트너 중에서도 여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설금희 = 육아 문제로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면 일정 기간 후 재입사 할 수 있도록 기업이 문을 열어 놓고, 지속적인 교육을 시켜야 한다. 경력이 멈추면 실력도 멈출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국가적으로도 인력 낭비 아닌가.
원귀정 =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분명 있다. 국가도, 기업도, 여성 자신도 이걸 잘 찾아내야 한다. 또 여성들은 대기업만 집착할 게 아니라 여자의 능력을 가장 인정해주는 곳이 어디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 그런 곳에 들어가서 그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양쪽 다 성공하는 길이다.
기업들도 회사 홍보 차원에서 여성 직원들을 배려할 게 아니라, 여성들의 가치를 진정으로 인식하고 여성들이 가장 빛날 수 있는 직무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회 = 고재학 기획취재팀장 정리= 유병률기자 bryu@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