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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2주년 기획/ 여성이 희망이다 - "한국 엄마들에겐 출산이 재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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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2주년 기획/ 여성이 희망이다 - "한국 엄마들에겐 출산이 재앙이죠"

입력
2006.06.0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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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대 영문과 83학번 이현영(43ㆍ여ㆍ가명)씨는 지난해 애들 학원비라도 보탤 요량으로 취업문을 다시 두드렸다. 둘째를 임신한 뒤 돌봐 줄 사람이 없어 8년간 다니던 사립 고교를 그만둔 지 10년 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비록 비정규직이긴 해도 일정한 월급을 주는 기간제 교사직에 지원했으나, 연락을 해온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시간강사로 낮춰 이력서를 다시 낸 뒤에야 모 고교에 취직할 수 있었다. 이씨는 “학교에서는 같은 값이면 부려먹기 편한 젊은이들을 쓴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면서 “이른바 명문대 인기학과 졸업장은 기혼여성이 재취업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고 씁쓸해 했다.

#2. 초등학생과 중학생 자녀를 둔 가정주부 김윤미(가명ㆍ고려대 불문 83)씨는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하자 취직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애들이 커가면서 사교육비 부담이 만만치 않은데다 남편 수입만으론 노후준비가 충분치 않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중ㆍ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에서도 ‘똑똑한 여학생’ 소리를 듣던 김씨였지만, 살림만 하던 아줌마가 취업할 수 있는 직장은 아무데도 없었다. 김씨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10여년을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느는 건 바가지와 수다밖에 없다”며 “엄마들끼리 만나면 ‘우리도 뭘 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들을 하지만 정작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려대 인문계열 83학번 여학생의 현주소는 국내 여성인력 활용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들은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그다지 높지 않던 시기에 소위 명문대에 진학한 엘리트 계층으로, 현재 왕성한 사회활동을 해야 할 40대 초반 연령층이다. 하지만 이들 중 정규직에 종사하는 경우는 10명 중 4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주부이거나 비정규직에 몰려있는 게 현실이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고려대 영문ㆍ불문ㆍ심리ㆍ사회ㆍ정치외교 등 5개 학과 83학번 졸업생 379명 중 주소지 파악이 불가능한 110명을 제외한 269명을 분석한 결과, 남자 졸업생의 정규직 비율은 78%에 달했지만 여성은 절반 수준인 40.2%에 머물렀다. 비정규직 비율은 여성이 17.5%로 남성(7.5%)보다 2배 이상 많았다. 남성은 대부분 교수를 목표로 하는 시간강사인 반면, 여성은 출산과 육아 문제로 직장을 그만뒀다가 학원강사, 학습지 교사 등으로 복귀한 경우였다. 이는 대학 졸업 후 정규직에 취업한 고학력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 탓에 직장을 그만둔 뒤,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에 재진입하는 ‘M자’형의 생애주기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정주부의 비율은 3명 중 1명 꼴인 36.1%로 조사됐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의 위력이 잔존하던 시대적 상황과 맞닿는 부분이다. 모 여행사 임원으로 일하는 임정미(심리)씨는 “졸업 무렵 여학생 9명이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소식이 대자보에 실릴 정도로 당시 여성들의 취직은 어려웠다”며 “‘결혼=퇴사’였고, 배부른 몸으로 직장을 다니는 건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남성에 비해 사기업보다는 학계 및 공공기관 진출 비율이 높은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남성 중심적인 조직문화 탓에 채용과정에서 여성을 홀대했던 사기업보다는 차별이 덜하고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영역을 선호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렇다면 저출산ㆍ고령화 대책이 연일 쏟아지는 요즘의 취업 여건은 과거보다 나아진 것일까. 아직 노동시장에 남아있는 고려대 83학번 여성들은 모성보호법, 남녀고용평등법 등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와 출산 장려를 위한 각종 제도들이 도입됐지만 정작 현실은 변한 게 거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여성들의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 출산과 육아를 ‘사회적 의무’가 아닌 ‘개인 가정사’로 보는 사회 분위기가 여전하다는 얘기다.

임정미(심리)씨는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가 방과 후에 혼자 방황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휴직계를 냈다”며 “미국에서 첫째를 키웠을 때는 학교에서 방과후 교실을 운영해 밤늦게까지 맘 놓고 일할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모두 뒷짐만 지고 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정부가 돈을 아무리 퍼부어봐야 시스템이 안 갖춰져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정부 입장에서는 저출산이 재앙이겠지만 엄마들에겐 출산이 재앙”이라고 쏘아 붙였다.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는 이명희(가명ㆍ영문)씨는 “성차별이 없는 걸로 유명한 외국계인데도 남자들은 주로 핵심부서인 외부영업에 배치된 반면, 여자들은 대부분 지원부서에 몰려 있다”고 꼬집었다. 이승희(불문) LG CNS 부장은 “갓난애를 친척에게 맡기기 위해 서초동에서 부천으로 집을 옮긴 적도 있다”며 “그나마 회사가 여직원 복지에 신경을 많이 써 준 덕분에 2차례 휴직하면서 애들을 보살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법에 규정된 육아휴직도 현실에선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중소기업 대표 박현숙(가명ㆍ사회)씨는 “같은 여자인데도 여자직원이 한참 바쁜 와중에 육아휴직을 낸다고 해서 화를 낸 적이 있다”며 “직원들이 주변 눈치 때문에 쉽게 육아휴직을 신청하지 못하는 게 우리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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