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ㆍ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무너진 것은 누가 봐도 마땅하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희망에 업혀 태어난 정부와 다수당이 선거 때의 간절함은 까맣게 잊은 채 로또에 당첨된 벼락부자 모양 거드름이나 피워댔으니 누가 그들을 곱게 보겠는가? 대통령이 한나라당과 여당 사이에 이념 차이가 없다며 연정 타령이나 하고 있는 판국에 굳이 무능한 여당에 표를 줄 까닭이 어디 있는가?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이 집권했다 해서, 어려운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어렵게 됐을까? 더 나아질 것도 없었겠지만, 더 어려워졌을 것 같지도 않다. 아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통령의 변덕스러운 언행 때문에 뒤숭숭할 일은 한결 적었을 테니, 외려 더 나았을 듯도 싶다.
● 진보·보수 양쪽서 버림받은 여당
이 정권의 가장 큰 잘못은 저를 지지한 사회적 약자들을 팽개치고 저를 경멸하는 기득권층 눈에 들려고 몸살을 해온 것이다. 이 윤리적 타락은 전략적으로도 패착이었다.
여권이 기득권층의 마음을 사려고 아무리 우향 돌진을 해 봐야, 보수적 유권자들 눈엔 이들이 '위장' 보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수적 유권자들 잘못만은 아니다. 여권의 몸뚱어리는 오른쪽으로 내달았지만, 그 입은 제멋에 겨워 진보 수사를 남발해왔으니 말이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가벼운 입은 유권자들에겐 다행스럽게 천기를 누설해주기도 했다. 대통령이 '좌파 신자유주의자'를 자임했을 때, 그 전까지 그를 신자유주의자라 제대로 보았던 진보적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속 편하게 지지를 거둬들였다.
그 전까지 그를 '좌파'라 잘못 여겼던 보수적 유권자들 역시 자신들이 앞으로도 결코 이 정권을 지지해서는 안 될 이유를 이 기이한 '양심선언'에서 기분좋게 찾아냈다. 유권자들은 모두 이 정권을 지지할 수 없다는 데서 일치했고, 그것이 이번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
이마에 '개혁 진보' 라벨을 붙이고 있든 말든, 이 정권은 지난 세 해 반 동안 계급적 배신을 저질러왔다. 대통령이 되기 전 노무현씨의, 그리고 국회의원 국무위원이 되기 전 유시민씨의 그 진실한 표정과 간절한 말투를 뭉클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배신은 인류라는 종의 비루함을 씁쓸히 곱씹게 하는 재료다. 그들은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선한 표정으로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어쩌면 책임질 생각이 없었던) 제 미래를 진지하게 얘기했다.
물론 사람의 비루함에 대한 씁쓸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이 대통령과 복지부장관만은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받은 지지의 크기를 보면, 이 사회의 가장 어려운 계층 사람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이 부패한 부자 정당에 표를 건넨 것이 분명하다. 이들의 계급의식은 어디로 갔는가?
한국 사회의 경제적 상층에 자리잡은 서울 강남 유권자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나라당 지지를 철회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이 부자들은 철저한 계급의식으로 뭉쳐 있다.
그런데 여당에 실망한 서민 유권자들은 왜 자신들을 대변하는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지 않았을까? 물론 서민들에게 소구할 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한 민노당 잘못이 크다. 그렇다 해도 부자 정당을 지지하는 가난한 사람들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 서민들 '부자 정당'지지 이해안가
그것은 언젠가 강준만이 얘기한 '주류콤플렉스' 때문일까?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부자 신문을 읽으며 주류환상을 즐기듯, 이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대변하는 정당에 투표하며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잠시라도 소비하는 것일까?
사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계급적 배신이다. 본디 중산층 상징자본을 지녔던 대통령이나 복지부장관의 배신과 달리, 가난한 사람들이 제 존재를 배신하는 것은 근원적 배신이기 때문이다.
사회 상층부가 계급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고 하층부가 거꾸로 된 계급의식을 소비하는 허영에 몰두하는 한, 사회 양극화의 출구는 없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마땅히 민노당 김종철 후보에게 표를 던져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하며 하는 말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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