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서정과 성찰, 반성의 시 세계를 단아하게 구축해 온 안도현 시인이 여러 동료 선후배 시인들의 시 48편을 골라 사진작가 김기찬씨의 사진들과 함께 책으로 펴냈다.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이가서)다.
그는 김종삼 시인에서부터 유홍준 정호승 김사인 고재종 함민복 김선우 이병률 황인숙 등의,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묻어두기 아까운 아름다운 풍경과 시정을 추려 소개한다.
그런 시들과 함께 시인 자신의 짤막한 감상을 적어 시와 독자 사이에 징검돌을 놓는다. 가령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로 이어지는 김사인 시인의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자의 외간남자가 되어’라는 시 뒤에 그는 “인생을 탕진한다는 말, 사내라면 이 아름다운 퇴폐와 무능력의 유혹을 한번쯤 꿈꿔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살짝 흐트러진 낭만의 한 자리를 펼쳐놓는 식이다.
거기에 최근 작고한 김기찬씨의 흑백사진 수십 점을 곁들였다. 바쁜 진보의 속도에 밀려 벌써 아득히 멀어진 70~80년대의 풍경들, 일회용 대나무 우산을 옆구리에 끼고 비 퍼붓는 거리를 내닫는 어린 소녀들, 동네 꼬마들에게 둘러싸여 의기양양한 뻥튀기장수 아저씨, 밥그릇을 든 소녀의 손을 응시하며 쪼르르 모여 앉은 10여 마리의 강아지들….
책은 4부로 구성됐다. 삶의 밑바닥에 놓인 웃음과 희망의 시(1부)들과 저물어가는 인생의 다양한 모습들(2부), 향토성 짙은 풍경의 시들(3부), 또 우리가 쉽게 잊고 마는 삶의 다양한 이면들(4부)이다.
흑백 사진들이 전하는 지난 세월의 사연들과 48편의 시, 그리고 안도현 시인의 감상 글이 서로 마음을 열고 소통하며 일궈내는 하나하나의 정경들이 이 책에는 숨어있다. 책 속의 그 하나하나가 책을 읽고 보는 이의 마음에 척척 감겨 드는 까닭은, 우리가 무심결에 버린 뒤 아쉬워하는 것들, 또 버린 줄도 모른 채 잊고 살았던 귀한 시간의 풍경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뒤돌아보지 않았어도 늘 “언제나 내 뒤에” 있어온 ‘그대’들이기 때문이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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