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정계 개편이나 부동산 가격 이야기가 아니다. 2006 독일 월드컵 이야기다. 한국 축구 대표팀의 부진함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지상파 방송사들의 저열한 월드컵 상업주의 이야기다.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회가 열렸을 때, 스포츠 신문보다 선정적인 TV 뉴스를 비판한 적이 있다. 3주 전에도 월드컵에 올인 하려는 방송사들의 ‘저돌적인’ 기획들을 비판한 바 있다. 혼자만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여러 학자들이 월드컵 상업주의에 찌든 방송사들을 비판했고, 인쇄 매체들도 우려를 표했다. 몇몇 시민단체들은 아예 월드컵 거부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송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시청률이 1% 올라가고 광고주가 웃을 수 있다면 욕 먹고 돌을 맞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뉴스’는 없어졌다. 아예 제목이 바뀌었다. MBC와 SBS는 편성표상의 뉴스 제목 앞에도 ‘2006 독일 월드컵 특집’을 박아 넣었다. 물론 내용도 이름에 걸맞게 짜여진다. 첫 소식은 독일에서 날아오고 리포트의 반 이상은 이미 월드컵이다. 한국팀 경기라도 있는 날이면 90% 이상이 축구로 가득 찰 것이다.
WBC 대회 때 방송사들은 뉴스의 70%를 야구에 할애한 전력이 있다. 삼일절에는 월드컵 D-100이라며 오후 내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더니 현충일엔 오전 추념식 중계만 마치곤 곧바로 월드컵 이야기로 가득 채웠다. 지상파 3사를 통틀어 현충일 특집 기획은 KBS 2편에 불과했고, 남은 자리는 ‘날아라 슛돌이’ ‘44인의 투혼’ ‘가자 독일로’ ‘구텐탁 월드컵’ ‘월드컵 인사이드9’ ‘독일로 가는 길’ ‘여기는 독일입니다’ 등이 차지했다.
TV가 없으면 월드컵도 없다. TV가 없으면 나이키도 아디다스도, 현대자동차도, SK텔레콤도 천문학적 금액을 축구 대회 하나에 쏟아부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방송사들은 “시청자들이 원하니까” 월드컵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변명한다. 월드컵 광풍을 만들려고 온갖 애를 쓰면서도 자신들은 월드컵 열풍에 동참할 뿐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2002년 붉은 옷을 입고 시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자발적 주체’였지만 지금 광장과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철저히 ‘소외된 객체’가 됐다. 방송물의 ‘엑스트라’로 전락했고 월드컵 광고의 ‘잠재적 소비자’로만 규정됐다. 월드컵 뒤에 숨은 국가주의적 속성을 증폭시켜 상업주의로 만들어내는 일. 요즘 방송사들의 일상이다.
돈을 벌기 위한 기업의 투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축구에 수 조원을 투자했는데 소득이 시원찮으면 그들의 판단 착오요, 그들의 손해일 뿐이다. 방송사는 다르다. 특히 공영 방송사가 그래서는 안 된다. 정말 돈을 벌려면 아예 상업 방송으로 전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스포츠 중계에서의 ‘보편적 접근권’ 주장부터 포기해야 한다.
지상파 3사가 주장하는 ‘보편적 접근권’은 자신들이 지배적 사업자이니 중요한 스포츠 중계는 자기네들이 해야 한다는 놀부 심보에 불과하다. 월드컵부터 디지털TV 채널을 쪼개 ‘멀티모드서비스’(MMS) 시험 방송을 시작하겠다는 것은 또 뭔가? 할당 받을 때는 1개 채널이었는데, 기술이 발달해서 서너 개 채널로 활용할 수 있다 해서 ‘공공의 재산’인 주파수를 모두 기존 사업자가 독점해야 하는가? 그래서 추가로 생기는 채널들은 모두 차범근, 황선홍 다큐멘터리 아니면 독일 맥주집 스케치로 채울 것인가?
이미 임기가 지난 방송위원회의 새 위원 선임은 난항을 겪고 있고, KBS 사장 선임 문제도 잡음만 들끓는다. 대단한 이권이나 되는 양 서로 하려고 힘 겨루는 사람들이 과연 지금의 저열한 선정주의에 관심이나 갖는지 의심스럽다. 정치적 편향성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 상업주의다. 시청률 만능주의다. 비판에는 귀 막고 왜곡된 광기만 만들어내면서 ‘보편적 접근권’을 주장하는 지금의 KBS, MBC를 누군가가 좀 바꿔주기를 기대한다.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윤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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