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정(情)이 많은 민족이다. 그러나 한가지 단서는 붙여야 한다. 아는 사람에게만 정이 많다. 한동안 지식인들의 글쓰기를 감시(?)했던 나로서는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했다. 평소 독설을 일삼던 지식인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글을 쓴다거나 자신의 평소 논지와는 다른 글을 쓰는 경우가 꽤 있었다. 수소문해서 알아보면 거의 예외없이 의문이 풀리곤 했다.
사적인 연고ㆍ정실 관계가 그 답이었다. 심지어 기계처럼 차갑고 냉혈한일 것 같은 지식인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알고선 쓴 웃음을 지은 적도 있다. 너무 사적인 문제인 것 같아 공개적인 글로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간 내가 발견한 사례들이 꽤 많다.
● 당파성에 情결합, 내부비판 안해
아는 사람에게나마 정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다만 문제는 공적인 거리두기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이는 민주주의 발전에 치명적인 장애일 수 있다. 비판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연히 내부비판도 기대하기 어렵다. 내부비판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설사 한다 하더라도 같은 편끼리 그럴 수 있느냐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소기의 성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인물 평판 검증은 정부 인사 자료를 제공하는 정보기관만 하는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적으로 평판 검증을 시도한다. 예컨대, 딸을 둔 아버지라면 사위 후보에 대해 여기저기 물어볼 것이다. 무슨 목적으로건 평판 검증을 많이 해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개성이 강한 사람의 경우엔 ‘양극화의 법칙’이 작동한다고 한다. 검증 대상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은 한없이 좋게 말하고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한없이 나쁘게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공적 비판행위는 바로 그런 양극화의 법칙에 충실하다. 우리는 그걸 흔히 ‘당파성’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실은 그 이상의 것이다. 기본적인 사실관계의 독해마저 아전인수 격으로 하는 걸 당파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당파성에 정(情)이 결합되면 거의 광신도 수준이 된다. 찬성이건 반대건 광신도처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집단적인 자기교정 능력의 상실이다. ‘반대 광신도’보다는 ‘찬성 광신도’가 더 위험하다. 반대편의 비판엔 악의적 포장이 씌워졌을망정 핵심은 타당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건 철저하게 무시된다. 무슨 말을 하건 ‘죽이기’나 ‘때리기’로 해석된다. 반면 우리편의 지지는 포장과 핵심 모두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나르시시즘의 함정으로 유인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민주주의는 자기교정 능력이 없는 민주주의다. ‘홍수 민주주의’라는 딱지를 붙여도 무방하다. 누구건 갈 데까지 간다. 잘못 가도 내부에선 아무 말이 없다.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잘못 가는 걸 막을 수 있을 만큼 일정 세력을 형성하진 못한다. 그러다가 선거 때 한꺼번에 응징당하는 패턴이 마치 여름철의 홍수를 닮았다.
홍수가 난 다음엔 사후분석이 쏟아져 나오는데, 모두 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들이다. 그런데 왜 홍수가 나기 전엔 그걸 몰랐을까? 우리편에선 그런 비판이 안 나왔고 반대편에서만 그런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 5·31 與참패는 친여 지식인도 책임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바람직한 면도 있다. 그러나 정(情) 많은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백해무익이다. 지식인이 정치에 머리를 빌려 주는가? 아니다. 지식인의 머리는 너무도 비실용적이어서 쓰임새가 거의 없다. 지식인은 간판만 빌려주는 것이다. 그 대신 자기 챙길 건 챙기기 때문에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5ㆍ31 지방선거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건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건강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엔 누구나 동의하리라 믿는다. 그 책임은 정부여당만의 몫은 아니다. 내부비판 기능을 방기한 친여(親與) 참여 지식인들의 몫이기도 하다. 정 때문에 망가지기도 하는 건 남녀관계만은 아니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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