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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생활수기/ 최우수작 김명희씨 "지옥여행… 희망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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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생활수기/ 최우수작 김명희씨 "지옥여행… 희망으로 돌아왔다"

입력
2006.06.0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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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길인지,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는 길인지도 모른 채, 아이의 치료법을 선택해야 하는 엄마의 심정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희망이 보일 것’이라는 일관된 믿음을 놓지 않았기에 좋은 결과를 본 것 같습니다.”

올해 제24회 여성생활수기 공모에서 최우수작을 받은 ‘더불어 만드는 행복세상’의 주인공 김명희씨. 그는 지난 겨울 아토피성 피부질환을 앓는 아이와 함께 ‘지옥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 기억이 생생한지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얼굴이 붉어지면서 눈물부터 펑펑 흘렸다.

한 집 걸러 한 집마다 앓는 아이가 있을 정도로 아토피는 흔하면서도 심하게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드는 병이다. 김씨는 진솔한 표현을 통해 많은 아이들과 젊은 엄마들이 겪는 아토피의 고통을 폭 넓게 공감할 수 있게 했다는 평을 받았다.

김명희씨의 아토피 치료법은 깨끗한 음식, 냉온욕, 죽염 섞은 올리브유 등으로 모두 자연요법에 기초한 것. 그러나 남에게 권하고 싶지도 않고, 권할 수도 없다고 한다. 아토피는 환자의 체질에 따라 치료법이 모두 다를 수 있어서다. 그래서 치료가 더욱 어렵다.

“아이의 고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됐습니다. 내려다 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 베풀어야 한다는 것, 확신과 희망을 가지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것 등등.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벗어나니까 얻는 것도 많네요. 그리고 할 일도 더욱 많아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긋지긋한 고통을 이겨낸 아이가 대견스럽고 또한 고맙단다.

친환경적인 것에 관심이 커진 김씨는 요즘 천연비누와 천연화장품을 직접 만든다. 어차피 가족이 평생 생필품으로 사용할 것이라면 내 손으로 믿을 수 있는 재료를 골라 만들고 싶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에야 김씨는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번 수상이 병마를 이겨낸 아이에게 좋은 선물이 되면서, 평생 그 병을 조심할 수 있도록 아이를 단단하게 해주는 채찍이 되기를 바란다며 함께 한 아이와 웃으며 볼을 비볐다.

■ 더불어 만드는 행복세상

짙은 어둠 속 희미하게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쫓아서 힘겹게 일어난다. 먼저 아이의 손을 저지하고 어둠에 재빨리 익숙해진 동공을 넓혀 아이의 몸을 찾아 어루만진다.

야속할 정도로 미운 밤손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나치지 않고, 승자가 이미 결정된 게임을 위해 다가오듯, 자신의 존재를 때때로 잊고 사는 나의 게으름을 비아냥거리듯 그렇게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찾아온다.

24시간의 전쟁은 의식, 무의식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지만, 정작 난 방관자 역할을 맡아 3살 아이의 피나는 전쟁을 피하지도 막지도 못한 채 묵묵히 바라보며 공포감에 떨고만 있다. 처음에는 저주를 퍼붓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했던 불청객이 어느새 감시하는 파수꾼이자 채찍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시간과 함께 인내심을 다져줬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다. “가…려…워…으…음…불어줘…엄마…불어줘…” 신음에 가까운 고통 섞인 가냘픈 목소리는 어느새 울음이 된다. 아무런 도움도 되어주지 못하는 엄마에게라도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는지, 순식간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필사적인 절규로 변한다. “엄마…엄마…아파…”를 되풀이하면서 내 가슴을 가차 없이 난도질한다.

1mm도 되지 않는 아이의 손톱은 긁는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은지 살갗을 벗겨도 벗겨도 멈추질 않고 온 몸을 파헤치며 하얀 살을 피로 물들여 놓는다. 맨살도 아닌 피로 얼룩진 상처투성이에 죽염 섞인 오일을 바른다. 따갑다는 울음 섞인 외침과 함께 그 작은 아이의 몸에서는 폭발 같은 절규가 시작된다. 새벽 어둠 속에서도 열을 뿜어내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생살을 가른 채 굵은 소금에 저려지는 생선을 생각한다. 그 순간만큼은 내 두 눈과 귀가 멀고 싶었다.

^아이의 절규는 나를 매일 밤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뜨렸고, 우리는 분노를 토해낼 대상을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 잊지 않고 찾아오는 새벽을 울부짖으며 보냈다.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힘든 벌을 내리는 것인지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살아있음으로 감사함을 느끼기에는 눈앞의 현실이 버겁게만 느껴졌고 피할 방법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무섭고 끔찍했다. 늦가을 낙엽이 수북이 쌓인 아파트 단지 앞에 겨울을 실은 차가운 바람이 회오리치듯 불었다. 낙엽들이 소용돌이처럼 거세게 빙글거리는 모습을 보며 “와~ 엄마, 나뭇잎이 춤을 춘다.”란 짧은 한 마디로 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아이는, 지금 내 가슴에 시리디 시린 차가운 칼바람을 힘껏 불어 밤새 정신없이 휘몰아치게 만든다.

^울다 지친 아이가 잠에 취해 잠시 잠깐 잠들고 나면 그 사이 나의 원죄가 무엇일까 반문하며 울음 섞인 기도를 하기 일쑤였고, 그 짧은 휴식 후 다시 아이의 손은 몸을 헤집는다. 자학에 가까운 형벌은 끝이 없는 시작으로 계속되었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을 웃으면서 맞이하기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시간과 뜨고 있는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짜증과 신경질만 가득한 일상이었다. 먹구름 가득한 어둠 끝에 찾아올 빛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끝에서 과연 우리는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18개월 정도의 연애기간을 거쳐 대학 졸업 후 결혼을 했고, 허니문 베이비인 아이를 낳아 키우며 별다른 고민 없이 한 가정을 꾸리면서 생활했다. 아이 역시 일년에 감기 한번 걸릴까 말까 할 정도로 건강해서 예방접종 외에는 소아과에 거의 가지 않을 만큼 뭐든지 잘 먹고 놀면서 건강했다. 하루하루 몰라보게 커가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 속에 행복했고, 자식이란 사랑 이전에 책임이란 생각으로 내 모든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다. 아이가 24개월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서서히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도 많아졌고, 또래 아이들보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아니 월등하기 위해 책과 교구를 구입했고 앞서가는 욕심을 쫓아가기 위해 조급해졌다.

단어를 말하는 아이에게 문장을 구사하길 원했고 노래를 하길 원했고 춤을 추길 원했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나의 욕심도 무한정 커져만 갔던 것이다. 뒤돌아보면 유난히 낯을 많이 가려서 엄마에게 집착하는 아이에게 한결같은 태도가 아닌 내 감정대로 행동할 때가 많은 그런 부족한 엄마였다. 내 큰 목소리만으로도 울먹거리며 “미안해요.”라고 허벅지를 끌어안으며 안아달라고 조르는 그런 아이의 한 엄마였다.

그랬던 시간들이 언제였는가.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어둠이 나에게 다가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철부지인 나를 고쳐주기 위해서 숙제를 내 주신건지 아니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죄의 값을 되돌려 주시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서서히 내 가정 안에서 그것도 내가 아닌 나의 아이에게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는 작년 5월부터 무릎 뒤를 가끔 긁기 시작했다. 위치가 눈에 띄는 곳도 아니고 잠들기 전 간간히 긁는 정도에서 그쳐서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여러 날을 지켜만 봤다. 다행히 긁는 범위가 무릎 뒤로 국한되어 더 이상 넓어지지는 않았지만 멈추지 않고 습관처럼 지속돼 아이의 무릎 뒤에 옅은 붉은 자국이 생겼다. 지켜보기만 할 일은 아니란 생각에 두세 시간씩 기다려야 진료가 가능한 유명한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이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입는 것과 꾸미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도 먹는 것에는 철저한 편이어서, 아이는 시중에서 파는 그 흔한 과자나 사탕조차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아이에게 쓴 한약을 토하지 않고 먹이기 위해서 처음으로 아이의 작은 손에 쥐어 준 것이 사탕이었다. 쓰디 쓴 검은 한약을 참으면 달디 단 달콤한 사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이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번 먹는 한약을 무작정 기다렸고, 수시로 나에게 약 먹고 싶다고 조를 정도로 아이의 24시간을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바로 사탕이었다. 증상이 심한 상태에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약 몇 개월만 먹으면 당연히 나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아이에게 그 후 5개월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약을 먹였다. 무릎 뒤를 잠들기 전 약하게 긁는 정도였고 일상생활 할 때는 아이가 긁는 것을 잊을만큼 경미한 정도였지만, 한약을 먹여도 그 상태는 나아지지도 악화되지도 않고 지루하게 지속되었다.

그러다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그제서야 부랴부랴 아토피에 대해 공부하고 찾으면서 생각 외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토피는 영, 유아를 가리지 않으며 환자의 대부분이 어린 우리 아이들이란 심각한 통계 자료에 경악했다. 유아 다섯 명 중 한 명, 네 명 중 한 명, 한 집 건너 한 집의 아이가 아토피일 정도로 흔한 질병이다. 엄마의 마음은 1/2의 높은 확률일지라도 당연히 나의 아이가 아닌 쪽에 속하길 바랄 것이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쁘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자기 자식이 특별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동안 아이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건강했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했던 질병이 절대 가볍게 넘어갈 질병이 아니란 걸 그때 깨달았다.

그러나 그저 막연하게 이 순간들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지켜봤다. 결국 이런 나의 소망을 무참히 짓밟으며 우려했던 현실이 우리에게 성큼성큼 찾아왔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무릎 뒤만 긁던 아이가 목과 배를 긁기 시작했고, 쌔근쌔근 곤히 자다가 새벽에 두세 번 정도 뒤척이며 긁다 잠들기도 했다. 한약을 계속 먹이던 중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놀람의 순간도 잠시, 곧 장대비를 쏟기 위한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특별하게 음식을 바꿔 먹인 暳?없었고 환경이 바뀐 것도 아니었는데 아이의 가려움이 급속도로 전신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전염이란 표현밖에는 달리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아이의 온 몸은 점점 가느다랗게 엉켜진 손톱자국으로 벌겋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번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휘둘린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똑같은 태풍을 만나도 마음가짐에 따라 그 중심의 핵에 당당히 서 있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그 주변에서 정신없이 빙글거리며 흔들린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풍랑을 만난 것처럼 무언가 믿고 잡을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해 부산하기만 했지, 정작 내 자신은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허둥지둥 달리기만 했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려웠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더욱 궁지에 몰렸다. 안타깝게도 두려움 끝에 자신감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토피에 좋다는 민간요법은 수십, 수백 가지가 넘게 존재했고, 때로는 염려 섞인 주위의 목소리들과 얄팍한 상술까지 한꺼번에 날아와 날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내 물건을 살 때에는 몇 번을 망설이는 지갑이 아이에게만은 아낌없이 열렸고, 되돌릴 수 없는 소중한 아이의 이 시기가 나의 주저함으로 인해 사라질까 두려웠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안전한 치료법이 아닌 그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어 효과를 본 그 무엇을, 무턱대고 아이에게 실행하기에는 겁이 났고 내가 아닌 내 사랑스런 아이이기에 더 주저되었다. 아토피가 사회적으로 이슈화 될 만큼 많은 환자가 있다보니 매스컴을 통해 이것저것 산발적으로 접하게 되는 정보도 날 혼란스럽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TV의 특성상 한 단면만을 부각시켜 극대화시키기 때문에 그것만을 믿고 불확실한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하기에는 마루타가 아닌 아이의 눈망울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양약이나 한약, 말 그대로 병원 치료를 받아서도 여전히 낫지 않고 시력 등 신체 다른 부분에 나타나는 부작용의 사례들, 무리한 민간요법을 실행해서 심지어 목숨을 잃은 경우 등 아토피에 관한 프로그램을 접하고 절망감과 무서움에 떨면서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널 어떻게 해야 하니. 아가, 엄마에게 말 좀 해다오.’라고 물으며 답답한 가슴을 치며 울었다. 눈물이 흘러내린 자리에는 더 많은 뜨거운 눈물이 날 옥죄며 외롭고 지치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나조차 아이의 상처투성인 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슬픔에 흔들리는 내 눈빛을 예민한 아이가 읽을까봐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의 아토피가 전신으로 퍼졌어도 신기하게 얼굴만은 깨끗해서 외출할 때 타인의 시선으로 인한 상처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그동안 겪지 않았던 혐오와 걱정 섞인 그 관심의 화살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아이에게도 절대 그런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옮는 전염병이 아닐지라도 타인의 눈에 그대로 노출되는 피부로 병을 말하기 때문에 환자 자신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고, 격리된 세상을 만들어 작은 자기만의 섬 안에 갇히게 만드는 외로운 병이 아이에게 찾아온 것이다. 예전에 무심코 지나치거나 그 아파하는 모습에 눈길 한 번 더 줬던 어떤 아이가 이젠 내 아이가 된 것이다.

더 이상 선택을 주저하기에는 증상이 점점 악화되는 아이의 모습이 꺼져가는 불꽃같아서 차마 미룰 수가 없었다. 그나마 믿었던 한의에서조차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벼랑 끝에 몰린 기분으로 차일피일 미뤘던 자연요법을 실천하게 되었다. 평생을 관리하지 않으면 또 되풀이 되는 병이라면 생활 속 잘못된 습관을 고치고 일상생활에서 무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을 택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직 아이가 어리기 때문에 환경오염이 덜한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곳으로 이사하고 싶었지만, 이미 문명의 이기가 주는 안락함에 노예가 되어 버린 생활 습관 때문에 그것은 최후의 선택으로 미뤘다. 아토피 때문에 이민을 가는 얘기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게도 해당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온천욕을 하기 위해, 해수찜을 하기 위해 몇 시간의 먼 거리를 달려가도 세 살짜리 아이는 수증기가 주는 뜨거움과 따가움을 못 견디고 몇 분 만에 지쳐 울어버렸다. 익숙할 만큼 지겹도록 듣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또 다시 내 마음은 가고 있는 길보다 가지 않은 수천가지의 길로 찢어져서 함께 쓰라리고 눈물이 났다.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택한 변형된 자연요법을 시작하였다. 어찌 보면 거창하게 자연요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먹거리만 조심하며, 풍욕과 냉온욕만 행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인 원래 먹거리에 관심이 많아서 예전부터 남들 눈에는 별스럽게 보일 정도로 가공식과 조미료 음식을 먹이질 않아 아이의 음식 거부감이 덜했다. 먹거리는 비싸서 가끔씩만 구입했던 유기농산물을 샀고, 우리 땅에서만 난 재료들을 아이에게 먹였다. 즐겨먹던 육류과 유제품을 완전히 제한했는데 기타 음식은 원래 가공식품을 즐겨 먹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식단이 바뀌지는 않았다.

큰 키와 통뼈의 상징이라 생각해서 매일 먹이던 치즈와 발효유, 즐겨 먹던 고기를 끊었지만 단백질 섭취의 과도한 제한도 성장에 저해 될 것 같아서 채식만으로 바꾸지 않고 거의 생선 등 해산물로만 식단을 차리며 두부와 친구할 정도로 ‘콩day’가 이어졌다. 나 역시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 갑자기 아이에게 무리하게 채식만을 강요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가중시킬 것 같아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바꾸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생각했다. 간식은 고구마, 감자, 옥수수가 주류를 이뤘고, 가끔씩 사 줬던 제과점 빵 대신 떡집만 들락거렸다. 특별한 것을 먹인 것도 아니고 단지 육식과 유제품을 제한하고, 풍욕과 냉온욕만 했을 뿐인데,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처절한 긴 한 달이 나에게 다가왔다.

6개월가량 먹은 한약으로 억눌렸던 찌꺼기들을 온 몸으로 토해내는 것인지 아니면 한꺼번에 몸 안의 뿌리까지 토악질을 해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의 몸은 이미 나빠진 상태에서 더욱 더 급속도로 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손톱이 더 길지 않은 것을 원망이라도 하듯, 마치 손마디에서 손톱을 뽑으려는 듯 열손가락이 온 몸을 구석구석 파헤치며 쉴새 없이 그리고 미친 듯이 춤추기 시작했다. 얼굴을 제외하고 목부터 시작해서 몸 구석구석까지 촘촘히 작은 도돌이들이 점령했고, 더불어 아이와 나의 새벽은 도돌이들과 함께 끝없는 여행을 떠났다. 종착역도 없고 출발점도 없는 여행을 아이는 24시간 떠났고, 밤마다 나는 10시간 정도 작은 옆 좌석에 앉아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한 채 무력하게 ‘제발, 제발’을 되뇌며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새벽마다 방문의 좁은 틈으로 새나오는 아이의 신음과 울음소리에 옆방에 잠든 남편과 친정 부모님 역시 함께 고문을 당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아이를 낳으면서 직, 간접적으로 친정의 도움을 받고 의지하며 생활했는데, 육아를 핑계로 실제로 우리 집보다 가까운 친정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학창시절 시계를 맞춰 놓고도 잠결에 시끄러운 알람소리가 들리면, 무의식중에 시계를 던진 후 계속 자 시계를 망가뜨린 적이 대여섯 번 있을 정도로 잠귀 어둡고 잠 많은 나에게 수면부족은 큰 병을 앓고 있는 것 이상으로 힘겨웠다. 아이와 나 모두 짜증이 잦아졌고 더불어 작은 일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할 때가 많았다.

어느새 내 얼굴의 미간은 항상 찌푸려져 있었고, 더욱 움츠러든 죄 없는 아이는 내가 눈에 힘만 주어도 고개를 숙이며 울먹였다. 가장 힘든 것은 아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마음을 배반한 입은 아이를 어루만져주기 보다는 가슴에 상처를 주기 일쑤였다. 아이에게서 눈을 떼면 항상 긁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눈 떠 있는 모든 시간은 항상 아이를 쳐다봤고 한 몸처럼 생활했다. 설거지나 청소 같은 소일거리조차 아이가 낮잠 잘 때 후다닥 서둘러 했을 정도로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춰서 생활했다.

어느 날 전화통화를 하다 얘기가 길어져서 아이를 방에 혼자 놔두었다. 전화를 끊고 아이에게 장난 칠 생각으로 조심조심 방문 앞으로 다가섰는데, 웃음 머금고 갑자기 나타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온 몸을 미친 듯이 긁고 있다 깜짝 놀라 멈춰버린 32개월 된 아픈 아이의 두려움 섞인 눈동자였다. 아이에게 더 이상 난 자상하고 따뜻한 엄마가 아니라, 쉬지 않고 짜증내고 잔소리하면서 “긁지마라.” 소리 지르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간지러웠으면 잠시잠깐이라도 마음껏 엄마 몰래 긁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도 못 내고 얼굴을 다리에 파묻고 흐느꼈다.

무방비 상태에 찾아온 체념 때문에 한순간에 희망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바스라져 버렸다. 당황한 아이는 “미안해요. 엄마, 미안해요.”를 연신 되풀이하며 나에게 잘못을 구했지만, 미안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아이를 아프게 낳은 나였다. 죄 많은 한 여자는 희망을 잃어버리고 좌절감에 울기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병들어 가는 것은 아이 뿐이 아니었다. 병원도 가지 않은 채 냉온욕이라며 한겨울에 아이를 15도 냉탕과 40도 넘는 온탕에 번갈아 저녁마다 억지로 집어넣었다. 찬물에서 오열하는 아이의 처절한 절규에 지친 가족들은 “애 잡지 말고 제발 병원에 가라”고 매일 구박이었고, 나 역시 나아지기는커녕 얼굴을 제외하고 맨살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아이의 상처투성이 몸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수천 번을 갈등했다.

자식보다 더 예쁜 손자의 울음에 친정엄마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피부과에 가자고 몇 번을 잡아 끄셨다. 그런 엄마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내 자식이니까 상관하지 마.”란 가시 섞인 독설로 부모의 마음에 또 다른 상처를 내며 다가오는 손길을 모조리 잘라버리고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빗장을 닫아버렸다.

아마도 나 역시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내 모습이 두려워서 더욱 굳게 문을 닫았던 것 같다. 하지만 식구들에게는 절대 병원 가지 않겠다며 일언지하에 딱 잘라 말하며 숨기 바빴던 나 역시, 새벽마다 아이와 함께 울며 ‘그래, 내일은 병원 가자. 가서 예약하자.’란 결심을 수 백, 수천 번 한다는 것을 그 누가 알까. 과연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오판으로 인한 상처뿐이라면 어긋난 아이의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해명하고 보상해 줄 수 있을까 상상하며 미치도록 무섭고 힘겨운 어둠 속에 운다는 것을 그 누가 알까.

하지만 결국 난 피부과에 가지 않았고 싸움을 기다리는 전사처럼 독기서린 창을 가득 품고 지옥 같은 한 달 정도의 어두운 시간을 아이와 함께 견뎠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아이와 함께 냉온욕을 하기 위해 대중탕을 간 적이 있었다. 그동안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바로 그 날 겪었다.

탕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는 빨간 괴물처럼 온 몸이 붉은 아이를 쫓아다녔고, 그 눈동자들은 이어 나에게로 향했다. 아픈 아이가 유전이 아니란 것을 확인한 눈동자들은 다시 여러 개로 나뉘어 안쓰러움도 담겨있고 한편으로는 징그러운 벌레 보는듯한 혐오감도 실려 날아왔고, 쯧쯧 혀 차는 소리로 변해 아련히 들리기도 했다. 마치 입 안 가득 고인 모래를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타는 듯한 목마름의 갈증, 토할 것 같은 매슥거림을 참으며 우리를 따라다니는 따가운 시선을 온 몸으로 힘겹게 받아들였다.

1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아이가 아토피냐고 물으며 친절하게 약을 권하는 사람까지 모두 만나게 되었다. 그런 시선들을 처음 접한 아이는 그 의미를 읽지 못하고 커다란 탕에서 신이 나 오랜만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웃음을 던진다. 냉온욕 시 온도유지가 중요하다고 해서 정액권을 구입해서 대중탕을 갈 생각이던 나는 그 날 이후 다시는 대중탕에 가지 않았다. 눈빛의 화살은 무방비 상태인 나의 온 몸을 들쑤셔놨고, 예민한 아이 역시 그 시선들을 두세 번만 다시 접한다면 그 눈빛의 의미를 읽을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고집 센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야만 한다는 사명감으로 아이를 끌어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갔다. 원래부터 유난스러울 정도로 먹거리에 신경 썼던 나에게 “넌 음식 조심을 했는데도 왜 아이가 아토피 걸려서 아프니?”라며 의미 없이 던진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마음이 타는 듯 했다. 나 역시 묻고 싶다. 물을 수 있는 대상만 있었다면 묻고 싶다.

왜 하필 우리 아이냐고. 왜. 왜. 내가 잘못을 했다면 얼마나 했다고 내 아이를 이렇게 흔들어 놓는 것인지 따질 수만 있다면 가서 온 몸으로 싸우고 싶었지만 원망, 투정조차 부릴 대상이 나에게는 없었다. 지금까지 나 역시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무심결에 내뱉는 말로 상처를 입히며 살아왔을텐데 정작 내가 아프고 나니 그 상처의 깊이를, 잊고 있었던 나의 죄를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공부할 때 책상에 붙여놓았던 ‘一喜一悲하지 말자’란 문구를 가슴에 아무리 새기려 노력해도 어느새 사라져버린 희망 앞에는 오직 오기만 남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아토피는 간단한 수술로 떼어낼 수 있는 신체의 불필요한 일부분이 아니다. 불치병으로 여겨질 정도로 완치되기 힘든 병인데, 지금 나의 아이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까 생각하면 가만히 아이를 쳐다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들기 전 매일 하는 냉온욕을 하기 위해 아이의 옷을 벗기고 늘 그랬듯이 아이의 몸 구석구석까지 살피면서 상처의 번짐과 도돌이의 움직임을 살폈다. 희망을 포기하고 마지막 남은 오기로 상황을 견뎠던 나의 눈에 마치 환한 햇살 같은 작은 변화가 들어왔다. 아이의 날카로운 손톱이 춤추고 지나가서 피가 난 화상처럼 검붉게 칠해진 다리 상처 부위가 아주 조금이지만 더 이상 넓어지지 않고 약간, 아주 약간 줄어든 것을 발견한 것이다.

포기할래야 포기할 수 없는 자식이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나에게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 작은 생명이 온몸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아이를 부둥켜안고 오랜만에 큰소리로 웃었다. 알몸의 모자가 서로의 살을 부비며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며 희망을 나누었다. 지친 몸으로도 강제로 냉온욕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늘상 목이 쉬어라 우는 아이였지만,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함박웃음에 영문도 모른 채 아이는 막연히 엄마의 행복에 취해 따라 웃기 시작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행복해서 웃고 또 한번 아이를 안고 웃고 또 안아보며 콩당콩당 힘차게 뛰는 아이의 심장소리를 들으니, 모조리 타 들어갔다고 생각했던 희망의 불꽃이 순식간에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 급속도로 번졌던 도돌이들은 고맙게도 번졌던 속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빠르게 사라졌다. 온 몸을 긁던 아이의 바쁜 손놀림이 배와 다리를, 그러다 다리만 긁기 시작했고, 새벽에 수십 번 깨던 아이가 열 번, 그러다 두세 번 뒤척이며 긁는 정도로 깨어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예전에는 잘 먹고 자라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참 많은 꿈과 욕심을 품었었다.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어른도 공경하며 예의 바르고 지혜로운, 현명한 아이가 되길 바라며 욕심 뒤에 따라오는 더 커다란 욕심으로 내 마음을 채워갔다.

그런 나에게 아이의 병이 찾아오면서 내 입에서 나온 말과 마음 속 소망은 단 하나였다. 흔히 하는 말처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제발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란 말 한마디가 뼈저릴 정도로 절실하고 간절한 나의 바람이었다. 결국 욕심이 하나씩 벗겨진 자리에 남은 본질이 건강이란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소중한 것의 존재가 사라진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고 하더니, 부족하고 또 부족한 나는 건강이 떠난 후에야 뒤늦게 후회하며 낙담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지난 일을 후회한다 해도 되돌아 올 수 없는 시간만을 바라보는 과오까지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체념하고 의무감에만 사로잡혀 행했던 모든 일들이 희망을 꿈꾸기 시작하니까 작은 진전, 발전의 모습에도 기꺼이 기뻐하게 되었고, 매사에 감사하는 생활 태도까지 더불어 찾아왔다. 또한 희망의 끝을 놓지 않기 위해서 의무감으로만 행했던 힘든 냉온욕을 아이에게 맞춰 강요가 아닌 즐길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꾸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아이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우리는 매일 밤 나쁜 벌레를 죽이기 위해 열심히 싸우는 씩씩하고 용감한 전사가 되어 이야기 세상 속으로 떠났다. 똑같은 일도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 많은 변화가 온다는 것도 이 때 깨닫게 되었다.

냉탕에서 숨 넘어 가듯이 30분을 줄곧 울기만 했던 아이가 나의 황당하게 꾸며낸 이야기에 간혹 울음을 멈추며 듣기 시작했고, 질문을 하기 위해서라도 울음을 그쳐야 했으며 얘기가 재미있을수록 탕에 있는 체감시간이 단축되어 서서히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38개월인 지금은 냉온욕을 하면서도 전혀 울지 않고 까르르 웃으며 수영한다고 발장구를 열심히 쳐, 욕실을 물방울로 가득 차게 만드는 장난꾸러기일 뿐이다. 냉온욕 잘 하는 아이들 모임에 나가면 일등 하겠다는 나의 부추김에 으쓱해서 엄지손가락을 높게 치켜세우며 자랑스럽게 웃는 씩씩한 아이로 달라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처음 냉탕에 들어갈 때는 긴 심호흡이 필요한지 4살 아이가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몇 분간 준비를 하다 스스로 물 속으로 들어간다. 우는 아이를 힘을 앞세워 거칠게 억지로 탕 안으로 집어넣던 강요는 사라지고, 아이의 준비를 기다리며 자발적으로 행하길 바라는 여유로운 마음도 생겼다. 갈수록 좋아지는 아이를 바라보며 자정능력의 놀라움, 자연 치유력의 힘을 느꼈고 햇살, 바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니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작은 행복의 일상이 또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환경은 바뀐 것이 없는데 마음가짐의 변화만으로도 삶은 새 옷을 입고 춤추기 시작했다. 호전 반응이 지속되었고 온 몸에 맨들맨들한 그리운 살색의 새살들이 보였을 때는 너무나 반갑고 신기해서 몇 번을 쓰다듬고 뽀뽀하며 아이의 인내심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 후로도 외식이나 간혹 누가 쥐어준 군것질거리로 인해 간간히 몸을 긁을 때가 있다. 숨죽이고 있던 아토피는 ‘다 나았다.’라는 마음에서 찾아오는 해이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한 수술을 견딘 강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작은 상처들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행하는 자신감 앞에서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일 뿐이다.

아이가 며칠 식습관을 철저히 조심하면 바람은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결국 아토피는 평생 사라지지 않는 존재로 아마 아이의 파수꾼이자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게 해 주는 매운 채찍이 될 것이다. 혹독한 시간을 겪은 후, 이제는 한번도 밤에 긁지 않게 됐다. 아이가 본인의 노력으로 이 심술궂은 친구를 지혜롭게 잘 달래기만 한다면 남은 삶도 충분히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 4살 된 아이에게 사탕이나 과자 같은 유혹의 식품들을 완전히 제한하는 것은 어렵다. 다른 아이들은 괜찮은 것을 왜 자신만 할 수 없는지. 아무리 설명해도 완전히 포기가 되지 않는 것 같다. 자지러지게 울며 냉온욕 할 때 “네가 냉온욕을 열심히 하지 않으니까 나쁜 벌레들이 사라지지 않잖아.

열심히 해야 더 이상 몸이 간지럽지 않고 뭐든지 다 먹을 수 있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이젠 매일 울?않고 열심히 냉온욕을 하는데도 나쁜 벌레들이 완전히 다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아이는 이상했는지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엄마, 안 울고 열심히 냉온욕을 하는데 왜 나쁜 벌레가 사라지지 않아?”라고. 난 말문이 콱 막혔다. 38개월인 아이의 머릿속에 좌절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했던 나는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바깥에서 먹는 음식 속에는 작은 벌레들이 많이 있는데, 그 벌레들이 무수히 많이 모이면 힘이 너무 세져서 벌레한테 지고 마는 거야. 그러니까 나쁜 벌레가 사라지도록 열심히 싸우자!”하고 씩 웃어줬다. 나의 말에 아이는 “나쁜 벌레 미워. 얍얍. 내 주먹을 받아라.”하면서 작은 욕조 안에서 발을 차고 손으로 물살을 가르며 주먹질을 한다.

보이지 않는 이 대상은 우리를 이렇게 길들이며 자주 봐도 늘상 어려운 손님으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여전히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거리를 다닐 때 또래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과자봉지나 막대 사탕은 한번도 먹어보지 않았지만 상상만으로도 맛을 꿈꿀 수 있는지 아이는 차마 달라는 소리는 못하고 눈을 떼질 못한다. 한번은 지하철 안 맞은편에 앉아 계신 할머니께서 아이를 바라보시더니 가방 속 사탕을 꺼내 먹으라며 건네셨다.

예의상 받아야 하지만 막상 사탕을 받게 되면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 아래 커져 버린 희망을 무참히 무시할 수가 없어 조금이라도 건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아예 싹을 키우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이런 호의는 매번 거절 해 왔었다. “괜찮습니다.”란 나의 대답에도 몇 번을 권하셨고 나 또한 미안한 마음에 “정말 괜찮습니다.”라고 사양하며 아이의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지 요즘 젊은 것들은 뭘 줘도 고마운 줄을 몰라”하며 할머니는 소리치며 화를 내셨다. 무안함에 얼굴이 빨개져서 눈가에 핑 도는 눈물을 참고 있는 나를 쳐다보며 과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줄 때 아이들이 과자로 만들어진 집을 발견하고 배고픔에 허겁지겁 집을 뜯어먹는 장면을 바라보며, “엄마, 제발 나 여기 좀 데려다 줘요.”라고 말해 내 마음에 비를 뿌렸던 나의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의 아이는 작은 사탕이나 과자 한 봉지에도 온 몸으로 반응을 하는데, 마귀할멈이 아닌 엄마인 내 손으로 독을 쥐어 줄 수는 없었다.

은행에서 손쉽게 쥐어주는 사탕은 도깨비가 가져가서 엄마 손을 맴돌다 사라져 버렸고, 결국 아이는 세상에서 도깨비를 제일 미워하는 장난꾸러기로 자라고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몸이 단련되면서 가끔은 해방감을 맛보라고, 때로는 몸의 반응 상태가 궁금해서 살짝 눈 감고 생협과자나 쌀빵을 줄 때는 있다. 며칠 전 우체국에서 건넨 손길에 어느새 의젓하게 자라 “아토피라 안돼요.”라고 사탕을 거절하는 것을 보면 시간은 우리에게 뺏어간 것보다는 채워준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힘든 시간을 거쳤기 때문에 인내로 단련된 단단한 아이의 의지는 자신의 삶을 풍요롭고 지혜롭게 헤쳐 나갈 값진 밑천이 될 것이다. 또 맨살로 접촉하며 어루만지고 끝없이 얘기하고 쳐다보며 쌓은 모자의 정은 크나큰 선물이자 흔들림 없는 사랑의 뿌리가 되고 있다.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유아대상 프로그램을 볼 때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이런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긁을까봐 노심초사해서 캥거루마냥 아이를 언제나 따라다녔던 눈이 내 안을 들어다보면서 새롭게 변한 점은, 아이만 쳐다봤던 눈을 돌려 새로운 취미생활을 갖고 생활 안에서 하나씩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이미 환경의 역습이나 심각한 자연 재앙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아이가 특별한 약을 쓴 것도 아니고 단순히 깨끗하고 안전한 먹거리와 냉온욕으로 몸을 단련해서 병을 이긴 것을 보면서 친환경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다. 아이의 아토피를 치료하기 위해 천연비누를 만들고 천연화장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생 생활 속에서 생필품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라면 내 손으로 믿을 수 있는 재료를 골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이의 아토피가 깨끗하게 안정된 후 접하게 된 취미생활이라서 사실 아토피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비누를 만들기 위해 아이 낮잠시간을 이용해 짬짬이 공부해서 만들었다.

어딜 가나 상술은 빠질 수가 없는지 곳곳에 천연비누를 써서, 혹은 천연 화장품을 써서 아토피가 나아졌다는 글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정말 비누 며칠 쓰고, 로션 몇 번 바르고 나아졌다는 제품평이나 자신의 경험담을 올린 글을 많이 보게 된다. 불과 3, 4개월 전에 이런 얘기를 접했다면 나 역시 상술에 놀아나 아이의 몸에 비누거품을 가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인공첨가물, 방부제가 들어간 시판비누에 비교한다면 장기적으로 사용했을 때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는 있겠지만 매일밤 미치도록 긁는 아이의 몸이 2, 3일 정도의 비누사용으로 진정되었다면, 이미 모든 것을 겪은 내 입장에서는 비누가 아니라 비누와 더불어 노력했을 그 바뀜에 있다고 생각된다. 비누와 화장품을 써서 바로 효과를 보았다면 그것이 만병통치약이 아닌 이상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만약 그렇게 효과가 있다면 특허를 내고 정식으로 약으로 출원해 아파하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밝은 빛을 선물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극한 상항에 처하면 필사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몸 안에 있는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될때까지 노력하게 된다. 자신이 아닌 자식의 일이라면 더욱 필사적으로 변한다. 문제를 인식하고 고치려 마음 먹었다면 단 하나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급한 마음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한꺼번에 할 것이다. 그 합쳐진 노력으로 얻은 성과를 꼬집어서 비누나 화장품으로 돌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돈 몇 푼의 이익일지 몰라도 구매자 입장에서는 그 하나하나가 희망인 것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멍들어가는 부모의 마음을 더 이상 무책임하게 흔들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처음 비누를 만들고 친구들이나 친척들, 신랑 동료들에게 모두 선물했는데, 정작 우리 아기에게는 그 후 4개월 정도 지난 최근에서야 비로소 사용했다. 그 전에는 아이는 손, 발 정도만 비누를 사용했고 그 외 신체는 물로만 씻어줬다. 지금도 일부러 천연비누로 온 몸을 씻기는 것이 아니라 비누가 필요한 곳만 사용하고 있다. 씻어내는 비누와 달리 피부에 남는 화장품은 지금까지 한번도 아이에게 만들어 준 적이 없다. 아기에게만큼은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최선의 것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 최선을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1년 내로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아이를 위해 만드는 그 최선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최선이기에 공부하고 만들며 배워가고 있다.

“이 제품 며칠만 발라 봐요, 먹어 봐요, 입어 봐요, 이 기계 설치해 봐요…” 등등. 우리는 약과 상품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마음은 흔들리고 작은 목소리에도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만약 내가 아이에게 냉온욕과 먹거리 단속을 하다 악화되는 아이의 모습에 두려워 중도에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방법을 찾아 떠났다면 어찌 됐을까.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기고 나갔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다행히 결과까지 좋았기 때문에 성취감도 크다.

현재까지 병을 앓기 전이나 후나 아이는 변함없이 잘 먹고 감기 같은 잔병치레는 아예 없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이 모든 것을 이겨낸 것은 사랑스럽고 대견한 나의 아이이다.

무엇보다 기쁜 것은 병과 싸우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생긴 다부진 인내심과 절제력이 장차 아이에게 선물할 미래의 모습이다. 온실 속의 화초는 작은 바람에도 힘겨워 하는데 부끄럽게도 아이가 아플 때 내 모습이 바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비바람을 맞으면서 아이와 더불어 나 역시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해졌고 운 좋게도 행복의 기준이 달라지는 행운까지 맛보게 되었다.

어머니의 다른 이름은 희생이라 하는데 자식의 다른 이름은 희망인 것 같다. 포기할 수 없기에 끝까지 매달렸던 절대적인 존재 바로 내 아이, 그 아이를 통해서 밝은 것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축복은 몇 개월의 시련을 통해 더 낮은 곳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움켜쥐기만 했던 손을 펼 줄 아는 배려의 마음도 생겼다.

얼마 전 버스 안에서 마치 한 쪽 얼굴을 엄청난 압력으로 훑어내린 것처럼 오른쪽 안면만 기형인 아이를 만났다. 예전 같으면 시선을 피하면서 속으로만 염려했을텐데 난 그 아이와 시선이 마주치길 일부러 기다려 그저 환하게 웃어줬다. 그리고 오랫동안 눈을 맞춰주었다. ^아플 때는 웃기가 힘들고 주위 사람의 웃음을 보기도 힘들어진다.

슬픔이나 기쁨 모두 전염되는데 슬픔이 주위에 퍼진 후에는 기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진다. 예전 하루종일 한번도 웃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이 생각나 아이에게 건강해지길 바라는 나의 웃음을 선물해줬다. 얼마 전만 해도 작은 상처에도 호들갑을 떨며 세상의 병을 내가 다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떠들기 바빴는데, 이젠 다른 사람의 상처의 깊이를 작게나마 헤아리고 그 아픔이 사라지길 진심으로 바라는 더 큰 마음을 갖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사소한 일이라도 행했을 때는 마음속으로 ‘이 모든 것들 아이에게 다 돌려주세요.’하고 선행의 대가가 아이에게 돌아오길 바라면서 생활했다. 그랬던 내가 아이와 병을 이긴 후부터는 ‘이 모든 것들 더 힘든 사람에게 돌려주세요.’하고 움켜쥔 손을 살짝 펴게 되었다. 대학생일 때 꽃동네를 몇 번 후원하다 잊고 지냈는데, 시간과 함께 나의 깨달음도 퇴색될까봐 이번에는 매달 출금되는 방식으로 후원 신청을 했다.

배가 고파 엄마 품에서 그대로 죽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 감히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피로 범벅된 살갗을 긁고 또 긁는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못 되어주면서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무력감에 울던 나였기에, 피눈물 흘리는 부모의 아린 마음을 이젠 작더라도 느낄 수가 있다. 현재 만 원 한 장에 내 손이 바들바들 떨리지 않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고 올려다보기 바빴던 나에게 내려다 볼 줄 아는 지혜를 갖게 해준 아이에게 너무나도 감사하다.

아마도 창조주는 나에게 더 넓은 시야로 많은 것을 내려다보길 바라셔서 아이의 병이라는 숙제를 내 주신 것 같다. 아니면 엄마다움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더불어 사는 따뜻한 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부끄럽게도 내가 지금 펼치는 손은 미약하다 못해 움켜쥐었는지 펼쳤는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궁색하기 그지 없지만,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듯이 자연과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면서 희망을 얘기하는 긍정의 힘이 내 안에서 점점 커가는 것을 느낀다.

요즘 부쩍 말썽을 부리는 아이에게 남편이 “미워”라고 했더니 아이는 “거짓말 하지 마. 엄마가 거짓말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란 대답을 해서 날 웃게 만들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는 글을 읽고, 소심하고 예민한 아이가 뛰기도 전에 움츠러들까봐 너무 아이의 기를 살려줬나 보다. 뽀뽀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고 믿는 아이의 세계에서는,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란 자존감이 어느새 자란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또래집단을 형성하고 더 큰 사회의 일원이 되어가면서 언젠가 아이도 결국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과 함께 깨질 진실이라 해도 최고의 위치에 서 있다는 만족감을 지금 이 시간만이라도 마음껏 누리길 바랄 뿐이다.

이젠 누구에게나 주어진 24시간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내느냐에 따라 지옥과 천국 사이를 손쉽게 오간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오늘도 나는 아이와 밤새 불려놓은 쌀을 방앗간에 가져가 쌀가루로 만들어 온다. 아이와 함께 향나무찜기에 봄내음 그윽한 쑥을 섞어 삶은 팥을 절구로 찧어 소를 만들어 서로 반죽하고 조물조물 실컷 주무르면서 아이와 떡을 찐다. 사 먹는 것보다 맛이 없고 모양이 예쁘지 않으면 어떠랴.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려진 밥상처럼 나와 아이의 일상도 그렇게 거품이 아닌 진실만으로 소복하게 쌓아 담으면 그 뿐이라 생각한다.

아이에게 절대적으로 묶여 있던 시간이 지난 후에 주어진 나만의 시간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내 자신을 돌아보고 작지만 끊임없이 배우는 과정 속에 성취감도 생기게 되었고, 공부하고 배우는 엄마의 모습이 아이에게도 생활 속에 배우는 간접적인 교육이 될 것이라 믿는다. 특별하게 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뛰어난 머리를 가진 것도 아니지만 작게는 지혜로운 엄마가 되기 위해서, 크게는 고여서 썩지 않는 물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두드리고 조물딱거린다.

자연을 생각해서 두 번 버릴 것을 한번 버리고, 행복을 전염시키기 위해서 두 번 화낼 것을 한 번 인상 쓰면서 보내는 일상은 머지 않아 자연스럽게 내 안의 습관이 될 것이다. 아이가 병원을 전전한 것이 아니어서 큰 명현반응을 겪지 않고 병을 이긴 것, 아이의 식습관이 완전히 굳어지지 않은 어린 시기에 병이 찾아와서 아이의 거부반응이 적었던 것 등등. 원망과 후회의 대상들이었지만 조금만 내려다보면 모두 감사한 일로 다가온다.

자연요법이 아토피를 앓고 있는 모든 아이에게 적용된다고는 결코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재 웰빙의 이름 뒤에 건강 먹거리, 바른 먹거리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 자연을 담은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데에는 누구나 공감하리라 믿는다. 수입농산물을 먹다 하루이틀 유기농산물로 바꿔 먹는다고 힘이 불끈불끈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피부가 뽀얗게 빛나는 것도 아니다. 만병통치약이 아니기 때문에 눈에 띄는 효과를 단기간 기대하는 욕심을 비운다면, 자연스럽게 시간과 함께 건강한 마음과 신체가 우리 곁으로 찾아올 것이다.

어리석게도 아이가 몹시 아플때는 원인조차 뚜렷하게 알 수 없는 질병을 원망하면서 마치 불치병에 걸린 아이를 둔 엄마처럼 내가 짊어진 짐의 무게 이상으로 허덕이며 힘들어했다. 본인의 노력과 환경의 전환만으로도 치유될 수 있는데 작디 작은 문제를, 삶을 내려다보지 못한 내 안의 부족함 때문에 더욱 덧칠해서 숨도 못 쉬게 만든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사합니다.’를 마음 속으로 외치며 살아가는 현재의 삶은 감사함으로 넘치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선물 자체이다.

얼마 전부터 자주는 아니지만 아이에게 고기를 조금씩 먹이는데 갈비뼈를 쥐고 맛있게 먹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적어도 우리가 즐기고 누리고 싶어하는 만큼 자연을 생각하고 보호한다면 아마 자연도 우리의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우리들의 편의를 위해서 파괴하기만 했던 자연이 이젠 그 대가를 우리가 아닌 우리 아이들에게 되돌려주려 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소비자가 유기농산물만을 원한다면 자연을 위해서나 농가의 소득증대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공급이 증가하면 가격도 내리고 결국 안전한 먹거리를 손쉽게 접하는 바람직한 순환이 이뤄질 것이다. 현명한 소비자들의 올바른 먹거리 선택으로 인해 품질 나쁜 식품은 저절로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고, 무엇보다 나의 살림이 농민, 국가의 살림이 되는 더불어 가는 사회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한순간에 바뀌는 것은 그만큼의 노력과 차이를 뛰어넘기 위한 고통이 뒤따른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지금 의욕적으로 배우고 공부하는 아로마의 세계부터 천천히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선물한 비누가 그 사람의 쌓인 피로와 찌꺼기를 부드러운 거품과 함께 기분 좋게 씻겨준다면 그 자체만으로 족하다. 비누 또한 자연을 담았기에 그대로 물에 녹아 또 다른 자연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면 작은 환경운동을 실천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힘겨운 날 뒤에 찾아오는 기쁜 날들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값진 것 아닐까 싶다. 아이가 몹시 아팠던 작년 겨울을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그 때는 깊은 상처만큼의 깨달음의 시기였다.

농담처럼 건네는 신랑의 한마디처럼 난 어쩌면 전생에 징기스칸이었을지도 모른다. 드넓은 벌판을 말 타며 뛰어다니지는 못해도 아이와 함께 하루하루 열심히 뛰면서 생활하고 싶고 이 시간이 쭉 지속되길 원한다. 훗날 시간이 지나면 아이를 자연스럽게 내 품 안에서 내보내주면 될 것이고, 그 빈자리를 가슴으로 낳은 아이들로 채워가며 살고 싶다.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이 배워야 하고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너무 늦게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으리라 믿으며, 아는 만큼 깨달음 만큼 실천하기 위해 오늘 하루도 난 씩씩하게 살고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아름다움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세상의 유무형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더불어 아름다워져야 하는 세상을 위해 웃으면서 하루의 문을 연다.

-끝-

권오현 기자 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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