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수동’ ‘친지동’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끝머리쯤이다. ‘위수동’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줄인 말이고, ‘친지동’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줄인 말이다.
줄이기 전의 말에는 북쪽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지도자에게 건네는 존경과 사랑의 뜻이 담겼겠으나, 남쪽에서 쓰인 줄임말들은 이와 반대로 비아냥거림의 뜻빛깔이 짙었다. 말하자면 남쪽에서 이 줄임말을 썼던 사람들은 학생운동권과 사회운동권 한 모퉁이에 둥지를 틀고 있던 이른바 주사파(주체사상파)가 아니라, 그 주사파를 빈정거리는 개인숭배 반대자들이었다.
그 시절 남한 운동권의 주사파가 실제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나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를 되뇌었는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위수동’ ‘친지동’이라는 말로 북한체제와 남한 주사파를 조롱했던 사람들 가운덴 그들과 이형동질의 전근대적 정조를 나눠 가졌던 박정희 숭배자들도 있었을 테니, 북쪽의 개인숭배에만 눈을 흘기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칭 6ㆍ15시대에도 북한에서 계속되고 있는 이 시대착오적 개인숭배는, 그것의 배경이자 효과인 최고권력의 혈연적 승계와 더불어, 북한 체제를 현대의 공산주의 체제로 여길 수 없는 근거다. 이 체제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좌익적 현대성이 아니라 우익적 봉건성이다. 이 봉건성은 북한 체제의 공식 언어에, 특히 개인숭배와 관련된 언어에 가장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1979년 북한 공업출판사에서 나온 ‘우리말 어휘 및 표현’이라는 책은 본문 앞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에 대한 존칭수식사와 수령님을 높이 우러러 칭송하는 표현’과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에 대한 흠모와 충성의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두 개 장(章)을 얹었다. 한국어를 숨쉬듯 사용해온 사람이 이 대목을 읽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것이 모국어의 큰 상처 하나를 엿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 적힌 한국어는 가장 장식적인 한국어가 가장 조야한 한국어이자 가장 타락한 한국어라는 것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오늘날, 가장 보수적인 역사학자나 논객들도 청년 김일성이 뛰어나고 어기찬 항일무장투쟁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온건한 정치 노선을 지지하는 논자들 가운데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기에 김일성이 내린 정치적 판단들과 그에 따른 실천을 기꺼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1950~53년 전쟁의 큰 책임이 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전후 복구 과정에서 김일성이 보여준 지도력이 걸출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것을 인정한 사람들이 존 로빈슨 같은 ‘좌파’ 경제학자나 루이제 린저 같은 ‘주석의 친구’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느 현대인의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설령 그가 김일성의 인물됨이나 행적에 비교적 너그러운 사람일지라도, 살아있는 지도자에게 헌정된 이런 허영의 언어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적 영웅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국제공산주의운동과 로동운동의 탁월한 령도자이신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
“인류가 낳은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빛나는 지략과 비범한 통찰력으로 전쟁의 매단계마다 탁월한 군사전략적 방침과 독창적인 전법들을 내놓으시고 강의한 의지와 비상한 혁명적 전개력으로 전체 인민과 인민군 장병들을 전쟁승리에로 령도하신 위대한 수령님.”
“한 고지를 점령하시고는 련이어 보다 더 높은 새로운 고지에로 대중을 불러일으키시는 비범한 혁명적 령도예술을 체현하신 위대한 수령님.”
“비범한 예지와 과학적 통찰력으로 천만고리 얽힌 매듭을 한 손에 꿰드시고 그 자리에서 명철하게 풀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
“인민의 모든 념원과 소원을 어느 하나도 빠짐없이 다 풀어 주시면서도 오직 하나의 념원, 장구하고 간고한 혁명의 길에서 쌓이고 쌓인 피로를 다문(다만) 하루, 한 시라도 편히 풀어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는 인민들의 절절한 그 소원만은 뒤로 미루시며 오늘도 궂은 날씨와 진창길, 이슬 차거운(차가운) 새벽길과 바람 사나운 바다길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몸소 현지지도의 길을 걷고 걸으시는 어버이 수령님.”
이 존칭수식사들에서 드러나는 김일성의 모습은 뛰어난 인간이라기보다 전지전능한 신에 가깝다. 그리고 힘들게 꾸민 이 신격의 겉치레 속에서 ‘인간 김일성’의 매력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이런 존칭수식사들을 만들어낸 북의 선전 담당자들은 이 꾸밈의 언어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거룩하게 하기는커녕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자신들이 그린 성화(聖畵)가 희화(戱畵)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데 생각이 조금도 미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것은 북의 이데올로그들이 심미적으로 매우 둔감하다는 뜻일 테다.
그리고 그런 심미적 둔감은 북 체제의 봉건성과도 끈이 닿아있을 것이다. 수령에 대한 인민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그 책에 예시된 문장들도 읽어 내려가기 거북하다. 거기서 들리는 것은 북한 사회의 구성원리이자 작동원리라는 주체사상의 대척에 있는, 극단적으로 비주체적인 인민의 목소리다.
“오직 위대한 수령님께 자기의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주체위업의 종국적 승리를 위하여 싸워나간다.”
이 문장이 인민에게 북돋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주체의 포기다. 그러니까 주체 위업의 승리를 위해서는 주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이 당당히 선언되고 있다. 이런 ‘종속된 자’의 다짐, 노예의 다짐이 네 면에 걸쳐 나열된다. 말투도 엇비슷하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무조건 접수하고 그것을 자로 하여 모든 것을 재여본다.”
“위대한 수령님의 사상의지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곧 법으로, 지상의 명령으로 여기고 그 관철에서 무한한 헌신성과 희생성을 발휘한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심려를 덜어드리는 것을 최상의 영예로, 신성한 의무로 여기고 오직 어버이수령님께 만족과 기쁨만을 드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고 있는 우리 인민.”
‘혁명의 뇌수이시며 심장이신 위대한 수령님’이 국가의 이름으로 이미 선포된 마당에, 모든 인민이 그 수족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미망(迷妄)의 언어들이 버젓이 활자화되는 것을 놓아두거나 부추긴 사람이 1930년대 한만(韓滿) 국경을 누비며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입이 씁쓸하다. 그리고 이런 씁쓸함을 느낄 만한 미각도 없이 저 몽매의 언어들을 태연히 받아들였을 80년대 남한 젊은이 일부가 스무 해 뒤 ‘뉴라이트’라는 때때옷을 걸치고 또 다른 극단에서 수구반동의 나팔을 불어대는 꼴을 바라보는 것도 씁쓸하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개인숭배 언어, 어제와 오늘
파시즘·공산독재자들 체제유지 수단 활용]
스타시스템·광고카피… 문화·스포츠 영역 침투
절대왕정 시대 궁중 프로토콜의 일부였던 개인숭배 언어는 현대에 와서 좌우의 전체주의 체제를 거들며 민중 영역으로 파고들었다. 1920~30년대 유럽의 파시즘 열풍은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에 무솔리니, 히틀러, 프랑코라는 독재자를 차례로 탄생시켰고, 이들은 각각 ‘두체’ ‘퓌러’ ‘카우디요’(지도자, 수령 따위의 뜻)를 자처하며 개인숭배를 슬며시 또는 까놓고 조장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스탈린과 마오쩌둥, 차우셰스쿠 등은 개인숭배를 통치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우익독재가 길게 이어진 남한에선, ‘국부(國父)’ 이승만 치하의 몇몇 돌출적 풍경을 제외하면, 북한이나 순정 파시즘 체제에 견줄 만한 개인숭배는 없었다. 개인숭배의 연료로 삼을 상징자본을 군인 정치인들이 권력 찬탈 이전에 마련해 놓지 못한 탓(이라기보다 덕분이겠지만)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시도의 흔적은 있다. 예컨대 1972년 10월의 친위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이런 말놀이를 아이들에게 유행시켰다. “1 일하시는 대통령, 2 이 나라의 지도자, 3 삼일정신 받들어, 4 사랑하는 겨레에, 5 오일륙 일으키시니, 6 육대주에 빛나고, 7 칠십년대 번영은 8 팔도강산 뻗쳤네, 9 구국영단 내리니, 10 시월유신이로다.” 역겨운 언어다.
발달한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에선 개인숭배가 없는가? 고전적 의미의 개인숭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문화-스포츠 산업의 스타시스템은 유사 개인숭배를 만들어내고 있다.
실제로 이런 스타시스템과 관련된 광고 카피나 저널리즘 언어, 문학상 심사소감, 팬사이트 언어 따위는 개인숭배 언어와 닮은 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이런 장식적 언어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을 통해서 전통적 글쓰기의 공간으로까지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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