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 정권이 아니라 중국과 대등하게 전쟁한 자주 국가였다.”
고구려는 전쟁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하고 멸망한 나라다. 고대 국가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고구려는 전쟁의 비중이 특히 큰 나라였다. 동북아의 강자로서 중국의 무력을 물리칠 만큼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고, 전쟁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했다.
고구려의 역사와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전쟁을 통해 살피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고구려연구회 주최로 9, 10일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열리는 ‘동아시아의 전쟁과 고구려’ 학술발표회. 고구려의 전쟁만을 주제로 하는 학술대회는 처음이다.
이인철 고구려연구재단 연구기획실장은 한사군(漢四郡) 존속 기간 동안의 고구려-중국 전쟁을 집중 조명한다. 한사군은 고조선을 멸한 한이 고조선의 옛 땅과 예맥에 세운 군현으로, 기원전 108년 설치돼 314년 소멸했다. 고구려와 중국의 전쟁은,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을 축출하는 싸움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게 이 실장의 주장이다.
당시 현도군은 지금의 함경도와 중국 지안(集安) 등지에 걸쳐 있었는데, 나중에 고구려를 세운 예맥족이 기원전 75년 현도군을 중국 랴오닝(遼東)성 신빈(新賓)현으로 몰아냈다. 195년의 후한(後漢) 기간 동안에도 후한과 고구려가 화해한 기간은 42년 뿐이고 나머지는 전쟁 상태였다. 화해 기간에도 사신을 보내거나 조공을 한 것은 단 한번뿐이었고, 중국의 고구려왕 책봉도 없었다. 마침내 314년 미천왕이 낙랑ㆍ대방ㆍ현도군을 차례로 공격해 한사군을 쫓아냈다.
이 실장은 “고구려와 중국은 이처럼 오랜 기간 전쟁을 계속했는데, 이는 중국이 고구려를 관할하지도 않았고,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당당한 독립국가, 주권국가 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효운 동의대 교수는 고구려와 왜의 전쟁을 살핀다. 고구려는 왜와 5세기 초 두 차례 전쟁했는데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전쟁은 제한전에 그쳤다. 특히 백제와 왜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군사력을 상호 보완했다. 강선 숙명여대 강사는, 6세기 이후 돌궐이 동북아의 강자로 떠오르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일방적 국제질서를 요구한 수나라와 연대해 공동 대응하는 등 실리적인 면모도 보였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고구려의 내분과 내전이 도리어 국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고구려는 내적 갈등이 심각했고, 그때마다 한강 유역의 주인이 바뀌는 등 국제 정세가 변했는데, 갈등 극복 과정에서 오히려 힘을 키웠다는 것이다. 다만 연개소문 아들들의 내분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절대 권력자가 사라진 뒤에 생긴 큰 공백에다 내분까지 겹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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