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저는 문학과 비평이 정답 없는, 규칙 없는 게임의 장이라는 생각에 시달려 왔습니다. 정답 없음이 비단 문학, 예술만의 문제겠습니까만, 저는 학생처럼 내내 이 물음에 사로잡혀 갈 길을 잃곤 해 왔습니다. 제가 이번에 제시한 안(案)은 말 그대로 그저 하나의 예시안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이에 대해 그럴 듯한 답안의 하나라고 후한 인정(認定)을 베풀어 평가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우선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살면서 참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만, 근래 들어 제가 더 많이 비평에 대해, 문학 비평에 대해 자신감을 잃었던 것도 사실이겠습니다. 어느 자리에서 비평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고, 또 그것을 솜씨 있게, 전략적으로 수행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따지는 일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글 쓰는 일 자체가 저에겐 해답 없는 과제로 주어집니다. 이 짧은 수상 소감 하나를 쓰는 일만 하더라도 저는 수다하게 고쳐서, 결국 할 수 없이 시간의 절벽 앞에 서서야 겨우 이렇게 빈곤한 수사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제가 ‘구텐베르크 수사(修辭 혹은 修士)들’이라는 제목을 내놓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제가 이렇게 늘 겪게 되는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바에 다름 아니겠습니다. 그런 한편 저는 연전 ‘수사(修辭)’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새겨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서양어에 해당한다고 하는 ‘rhetoric’에 대해서는 제가 더 이상 깨우치기 어려우나, 한자어 ‘수(修)’에 대해서는 제가 우연히 그 말의 원 뜻을 음미하게 되면서, 새삼스런 위안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요컨대 그것이 꾸밀 수가 아니고, ‘닦을’수(修)라고 하는 것, 곧 이 닦음의 의미 행간과 관련하여 저는 무엇인가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
다 아시겠지만, ‘구텐베르크’라고 하는 말은 제가 마샬 맥루한의 ‘구텐베르크 갤럭시’라는 제목 언어에서 따오게 되었습니다. 맥루한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참 저 은하계 성운과 같은 수많은 언어, 활자들의 세계에서 삽니다. 물론 어린애 팔을 비틀듯 그렇게 손쉽게 말을 지어내며 언어 게임을 수행해 오는 자도 있겠지만, 아마도 더 많은 작가, 시인들이 그렇게 언어와 씨름하며 한 평생을 보내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시간이 지나서야 사물은 제 모습을 비추게 되는 것일 테지요. 지난 연대 같으면 제가 지금 내놓고 있는 이야기들이 무슨 잠꼬대의 언어냐고 타박받기 쉬웠겠지만, 이제 이렇게 문학이 (누군가의 표현으로) 그 옛날 소도 같은 자리에 유배당한 처지가 되어서는 오늘의 작가, 시인들이 그야말로 책상 앞에서 필사에 골몰하는 수도승, 행자와 같은 모습으로 비치게 된 시절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제 말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제 혼자 속으로는 가만히 은거, 은둔할 수 있는 것이 큰 수행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는데, 저로 인해 세상이 이렇게 부산해질 줄은 몰랐습니다. 바라기는 ‘소설건축론’을 제기한 팔봉의 언설처럼, 아름다운 건축의 글을 짓는 것입니다. 끝내 갚을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역시 수많은 은공을 저로서는, 좋은 아름다운 글로 갚을 수밖에 없다는 다짐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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