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면 어떤 의무감에 시달리는 것 같다. 아이에게 무언가 최고의 것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어린이집에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ㆍ고등학교, 대학교로 이어지는 모든 교육과정에 대한 조바심은 물론, 아이 주변의 환경과 친구들 역시 엄마 눈에 마땅해야 한다.
장남감만 해도 그렇다. 피카츄, 디지몬, 햄토리… 유행이 바뀔 때마다 엄마도 아이만큼이나 재빨리 그 이름을 외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까다로운 엄마라 자부해도 유행의 홍수 속에 사는 아이에게 시달리다보면 “안돼!” 소리는 무색해지고, 결국 아이 손에 들린 장난감의 값을 치르게 된다. ‘이게 아니지…’ 싶은 불쾌감을 품은 채로.
지금 아이가 가지고 노는 놀잇감을 자세히 보자. 플라스틱 권총, 플라스틱 자동차, 플라스틱 로봇…, 온통 플라스틱이다. 차갑고 딱딱하다. 그 많은 장난감을 손에 넣고도 아이는 곧 “심심해”하며 투정을 놓는다. 현란한 색과 귀를 자극한 전자음도 잠깐의 흥미를 자극할 뿐, 지속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 어떤 장난감, 어떤 놀이를 주어야 할까?
“오웬에게는 노랗고 보드라운 담요친구가 있었어요. 아기 때부터 함께 지내 온 친구, 그 이름은 뿌뿌. 오웬은 뿌뿌를 너무너무 사랑했어요”로 시작하는 ‘내사랑 뿌뿌’(케빈 헹크스, 비룡소)를 보자. 뿌뿌는 언제나 오웬 옆에 있다. 화장실에서도, 식당에서도, 계단에서도, 방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서도. 대장 놀이를 할 때는 멋진 망토가 되어 주고, 감쪽같이 안보이게 숨겨주기도 하고, 쪽쪽 빨아 볼 수도 있고, 꼭 껴안고 잘 수도 있는…. 이렇게 뿌뿌는 오웬의 가장 좋은 장남감이다.
엄마 아빠의 어릴 적 놀이감을 떠올려보자. 공기돌, 막대기, 흙, 모래, 물…, 이렇게 흔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이 자연물들은 종일 가지고 놀아도 해지는 줄 모를 정도로 흥미로웠고 창조적이었다. 이제 우리 아이의 장난감을 유행에 끌려, 상점의 진열대에서 찾지 말자. 오웬의 담요친구 ‘뿌뿌’처럼, 아이의 주변에서 찾자. 온몸을 말았다가 다시 풀고 까꿍놀이도 하는 이불이나, 슈퍼맨의 망토가 되고 콩쥐의 치마도 되고 아가를 업는 포대기도 되는 천은 위험하지 않고 따뜻한 장난감이다.
나무토막도 좋은 장난감이다. 굳이 장난감 가게에서 비싼 돈을 주고 반듯반듯하게 잘라진 나무블럭을 살 필요가 없다. 산에 갔을 때 주워오거나, 동네 목재상에서 작업 후 남은 토막들을 얻어다 쓸 수도 있다. 제멋대로, 마구잡이로 생긴 나무토막들이 훨씬 멋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 다양한 생김새만큼 아이들의 상상도 창조적이게 할 것이다. 호두나 명자나무 열매, 조그만 돌멩이… 따위를 예쁜 주머니에 담아 아이에게 선물로 주자. 그 순간 볼품 없던 돌멩이가 아이의 보석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아이 주변의 사물을 아이와 인연이 닿게 해준다면? 엄마에게는 더욱 건강한 장난감을 마련해준 뿌듯함이 남을 것이다. 아이는?, 주변 그 어느 사물도 하찮게 보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구일 수 있으니까.
어린이도서관 ‘책 읽는 엄마 책 읽는 아이’ 관장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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