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1일 의장직을 사퇴하면서 ‘현애철수장부아(縣崖撤手丈夫兒)’라는 말을 남겼다. “낭떠러지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는 것이 참된 대장부”라는 뜻의 이 말은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한테 써준 글이다. 패장(敗將)으로서 구구한 변명이나 연연함 대신 낭떠러지에서 손을 떼는 자책을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 행간에는 “죽음으로써 산다”는 사즉생(死卽生)의 미학도 깔려 있기는 하다.
취임 104일만의 퇴장. 정 의장은 정치인생 1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2004년 4ㆍ15 총선 직후 노인 폄하 발언으로 의장직에서 물러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총선 대승의 주역으로 박수를 받으며 떠났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사상 최악의 참패는 의장직 사퇴뿐 아니라 대선주자의 입지마저 크게 흔들리는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의 정치역정은 화려하고 순탄했다.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전북 전주에서 전국 최다득표를 얻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소장파의 상징으로 성장을 거듭했고 집권여당 의장을 두 차례나 지냈다. 그런 그가 앞 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백의종군’의 길을 가게 됐다. 정 의장은 회견에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가장 낮은 곳에 서서 희망의 싹을 키우기 위해 땀 한 방울이라도 보태겠다”고 말했다. 침울한 표정이었고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쉬어 있었다.
정 의장은 일단 몸과 마음을 추스를 생각이다. 그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쉴 새 없이 강행군을 펼쳐왔던 그가 이날 오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 의장은 당분간 정치인생을 원점에서 성찰할 시간을 갖겠다고 한다. 왜 국민이 멀어졌는지, 국민에 다가갈 방도가 무엇인지도 찾아 본다고 한다. 한 측근은 “내공을 쌓는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책을 쓸 수도 있다고 한다.
일각에서 7ㆍ26 재보선 출마설도 나왔지만 이는 전혀 고려치 않기로 했다.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당기간 당을 떠나 자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것이며 국민들이 다시 ‘정동영’이라는 이름 석자를 부를 때까지 인내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지금 국민과 진정한 대화를 시작한지도 모른다. 그 동안 그는 국민들에게 ‘잘 나가는 산뜻한’ 정치인으로만 인식된 측면도 없지 않다. 이제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국민들과 나누는 교감을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돌아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기회가 있다면 국민들이 그가 토로한 고통, 자성, 성찰의 진정성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때가 아닐까 싶다.
정녹용기자 ltree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