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정오 서울 시청 앞 광장,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도시락 가방을 하나씩 들고 모여들었다. 봄소풍이란다. 교복도 제각각이고 “형”,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학교도 학년도 뒤섞인 모양이다. 그런데 명찰에 적힌 이름이 심상치 않다. ‘레인 키스’, ‘귀공자’, ‘코알라’…. 대체 이들은 뭘 하는 학생들이지?
이쯤에서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떠올려보자. 성인 남녀 주인공이 고등학교 때 입던 교복을 챙겨 입고 나이트 클럽에 들어가려다 출입 금지를 당한다.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신분증을 기도의 눈에 바짝 들이댄다. 그는 통쾌하게 웃으며 클럽에 들어가는데 가볍게 성공. 그 뿐이랴. 이것도 모자라 여주인공은 종횡무진 무도회장을 주름 잡지 않았나.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교복을 입고 나이트를 누비는 영화 속 주인공이 한번쯤 돼보고 싶다면, 여기 교복을 입고 만나는 이색동호회가 있다. 이름하여 ‘교복을 입고 텨!텨!텨!(줄임말 ‘교텨’. cafe.daum.net/uniformfriend, cafe.naver.com/schooluniform)’.
“젊은 친구들은 교복 입기 엄청 싫었다는데 저는 교복 세대가 아니라 그런지 옛날부터 교복이 참 입고 싶었어요. 나이트클럽 출입구에서 미성년자로 한 번 걸려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러기엔 얼굴이 너무 삭았나요? 하하.” 박찬기(35ㆍ직장인)씨는 2002년 카페가 처음 개설됐을 때 친구소개로 가입했다. 9만원 주고 집 근처의 성동고등학교 교복을 바로 구입했다. 짧은 머리 때문인지 막상 입고 보니 제법 어울리더란다. 매일 비슷한 생활 속에 한 달에 한번 갖는 이 모임은 몇 년째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회원은 20대 초반부터 30대후반까지 다양하다. 남녀 비율도 대략 반반. 요즘은 여자 신입생이 늘고 있다. 그간 재미난 에피소드도 많았다. 2002년 교복을 입고 120여 명이 우르르 나이트 클럽에 출동했는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불량 청소년으로 오인해 신고한 것이다. 경찰은 50여 명의 주민등록증을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동호회라는 그들의 말을 믿고 돌아갔다. 나이트 클럽을 나와 호프집으로 이동하자 같은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같은 날 세 차례나 경찰에게 주민등록증을 꺼내보여야 하는 곤욕을 치렀다. 그날 이후 이런 사고(?)를 방지하기위해 공공장소에서는 담배나 술을 금하고 있다.
작년에는 교복 덕도 봤다. 20여 명이 놀이공원에 놀러 갔는데 묻지도 않고 청소년 입장권을 끊어주더란다. 이처럼 모일 때마다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게 ‘교텨’의 묘미다.
고등학교 때부터 회원으로 활동했다는 이승조(22ㆍ군인)씨도 해맑게 웃으며 한 마디 거든다. “아주 신선해요. 잊고 있던 ‘말뚝 박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수건 돌리기’ 등 옛날에 하던 놀이들을 하니까. 아무나 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모임임은 확실합니다.”
지난달 신촌 번개 이후 한 달 만에 만난 이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교복을 차려 입고 아쉽기만한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가 추억을 곱씹었다.
조윤정기자 yjcho@hk.co.kr
■ 교복만 입고 오세요! 게임하고 소풍가고
“요즘 교복이 얼마나 비싼 줄 아세요? 20만 원씩이나 하더라고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교복을 못 사는 학생에게 교복을 사준다든지, 이제 차츰 좋은 일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2년째 ‘교텨’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정건아(25ㆍ직장인)씨. 동호회를 만든 윤난혜씨가 개인적인 일로 탈퇴하면서 열심히 활동해온 일반회원 정씨에게 모든 것을 인수인계를 했다. 첫해 고아원 방문을 빼고는 여태껏 거의 친목위주로 활동해왔으나 이제부터 봉사활동도 병행할 생각이다. 교복 모임인 만큼 특히 학생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회원수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정 회장 혼자 관리가 힘들어지자 초창기 멤버 정유덕(24ㆍ직장인)씨를 부회장으로 임명했다. 정기모임 전에는 둘이 준비모임을 갖고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내 프로그램을 짜기도 한다.
“처음에는 설마 사람들이 교복을 입고 나올까 싶었어요. 그런데 웬 걸요. 한명도 빠짐없이 교복을 입고 나타나는 데 정말 놀라울 지경이었어요.” 쑥스러움이 많은 정 회장은 초창기에 괜히 사람들이 교복 입은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아 창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식하던 복장은 어느새 ‘그들만의 추억 쌓기’에 묻혀 무감각해졌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에 가입했지만 지금은 진한 애착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비슷한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추억을 나누는 시간, 이게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사실 학창 시절 에피소드라는 게 거의 비슷비슷하거든요. 공감대 형성이 잘 되니까 금새 친해지고요.”
이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반나절간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다. 한 달간 쌓아뒀던 스트레스를 이날 와서 확실히 풀고 간다는 회원들이 많단다. 그래서 회원수도 계속 늘고 있다. 정유덕 부회장도 맞받아 쳤다.
“맞아요. 학교 다닐 때가 제일 좋았다는 말, 우리 직장인들이 툭하면 하는 얘기잖아요. 우리가 모이는 그날, 그 순간만큼은 그때로 돌아가기 때문에 마음이 편한 거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경기, 인천 지부도 생겨났다. 가까이 사는 회원들끼리 가끔 오프 라인 모임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다른 지역 회원들도 늘어나면 제주도까지 전국구 친목 게시판을 신설할 계획이다.
“사정상 학교를 못 마쳤거나 학교 때 제대로 추억을 만들지 못한 분, 모교 교복을 뽐내고 싶은 분도 좋고, 학교 때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은 분, 학창 시절 추억을 얘기하고 싶은 분들, 이 모두에게 ‘교텨’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일단 한번 와 보세요.”
조윤정기자 yjcho@hk.co.kr
■ '엽기적인 그녀'서 아이디어… 회원 1만명
‘교복을 입고 텨!텨!텨!(cafe.daum.net/uniformfriend, cafe.naver.com/schooluniform)’는 윤난혜(28ㆍ사업가)씨가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2002년 6월 만들었다. 단순히 ‘학창시절에 못했던 것,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한번 해보고 싶어서’ 만든 이 카페 회원은 개설 한 달 만에 7,000여 명이 가입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4년 가까이 된 현재 1만 명을 넘어섰다. 전체 회원의 60%가 직장인이다.
오프라인 모임은 학창 시절 학교 행사처럼 신입생 환영회, 봄소풍, 수학여행, 체육대회 등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눠 진행된다. 정기 모임 때는 학창시절 ‘억압의 상징’이었던 교복을 입고 명찰도 달고 참석해야 한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수다도 떨고 당시 했던 일들이나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모아 하나씩 해나간다. 한 달에 한번씩 가볍게 만나는 번개 모임 때는 영화도 보고 공원에서 학창시절 하던 게임도 하고, 떡볶이도 먹으러 다니고 가볍게 술자리도 갖는다.
카페 사이트 운영도 학교처럼 이뤄진다. 동호회 회장을 교장으로 칭하고 부회장은 교사, 출석률이 좋은 특별회원 30여명은 반장, 나머지는 모두 학생이다. 공지사항도 가정통신문을 통해 회원들에게 발송하고 출석체크도 한다. 지역별로 소모임을 가질 때는 학교장이나 교사의 허락만 받으면 된다. 운영에 방해가 될 정도의 회원 간 이성 교제 시에는 바로 교사 면담에 들어간다는 점도 재미있다.
가입은 온라인으로 하면 되고 30대후반까지 누구나 가능하다. 사이트 내에 교복 구입을 원하는 회원을 위해 ‘교복시장방’도 만들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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