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당신의 무덤을 만들었나이다, 오 거룩하고 높으신 이여/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하고, 몹쓸 짐승이며, 게으른 식충이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은 영원히 사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안에서 우리가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6세기께 에피메니데스라는 사람이 썼다는 ‘크레티카’라는 시의 일부다. 이 대목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가 제 아버지 제우스에게 하는 말이다. 전설 속 왕 미노스가 제 동포 크레타 사람들을 거짓말만 한다고 책잡은 것은 이들이 제우스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노스가 보기에 제우스는 불멸의 존재였다.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의 에게문명을 미노아문명이라 부르는 데서도 엿보이듯, 미노스는 크레타 역사의 상징적 이름이다. 그러니까 미노스 자신도 크레타 사람(신을 아버지로 두었으니 반쯤은 신이겠으나)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는 그의 말을 되새겨 보면, 미묘한 상황이 빚어진다. 그의 말은 참말일까 거짓말일까?
아니, 미노스의 부분적인 신격(神格)이 마음에 걸린다면, 이 시의 저자로 알려진 에피메니데스가 이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사실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는 말은, 비록 미노스의 입을 빌어 발설되긴 했으나, 에피메니데스 자신의 말이랄 수 있다. 그는 열렬한 제우스 찬양자였고 이 최고신의 불멸을 믿었다. 에피메니데스의 생애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그는 크레타섬 크노소스 출신으로, 고대 지식인들이 흔히 그랬듯 시인과 철학자와 점술가를 겸했다. 크레타섬의 한 동굴에서 57년 간 잠을 자고 깼는데, 그 뒤 예언 능력이 생겼다고 전한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솔론 전기에 따르면, 에피메니데스는 솔론의 아테네의 개혁을 도왔다고 한다. 그는 또 제 예언 능력을 이용해 스파르타의 군사 고문 노릇을 하기도 했다. 에피메니데스가 죽은 뒤 피부에서 문신이 발견됐다는 2세기 그리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의지해, 뒷날의 역사가들은 그가 고대 중앙아시아의 샤먼 가계 출신이 아닌가 짐작하기도 한다. 앞에 적은 에피메니데스 시의 일부는 신약성서에서 두 차례 인용된다.
오늘 얘기의 실마리인 둘째 행은 바울로가 크레타섬의 디도에게 보낸 편지(디도서 1:12)에 어느 크레타 예언자의 말로 인용되고(크레타 사람과 유대교를 포개며 둘 다를 비난하는 맥락이다), 넷째 행은 사도행전에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된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행전 17:28)는 구절이 에피메니데스의 제우스를 기독교적 신으로 바꿔치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곁가지가 길었다.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는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의 말은 참말일까 거짓말일까? 일단 참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말을 하는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거짓말만 할 것이고,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온 이 문장은 거짓이 된다. 다음, 이 문장이 거짓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말을 하는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문장은 참이 된다. 말하자면 이 문장은 참말이면서 거짓말이다.
또는 참말도 거짓말도 아니다. 논리학의 모순율(어떤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과 배중률(모든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다)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가당착으로 보이는 진술을 역설(paradox)이라고 한다. 역설은 불합리해 보이지만 타당한 논증이다. 하나의 진술이 명백히 타당한 추론에 의해서 두 개의 모순되는 결론을 낳을 때 역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에피메니데스 역설은 논리학자들이 흔히 거짓말쟁이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다.
그런데 곧이곧대로 말하면, 에피메니데스 문장은 역설이 아니다. 앞의 추론에는 중대한 속임수가 하나 있었다.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는 에피메니데스의 말이 거짓일 경우엔, 이 문장이 그대로 거짓으로 남을 수도 있다. 앞의 추론에서 “이 말을 하는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라는 말 자체가 속임수였지만, 그가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에피메니데스말고 다른 크레타 사람 가운데 참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의 첫 거짓말쟁이 역설을 만들어낸 영예는 에피메니데스보다 2백년쯤 뒤에 살았던 밀레토스 철학자 에우불리데스에게 돌아간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의 이 말은 참말인가 거짓말인가?” 에우불리데스의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이 말이 참말이게 거짓말이게?” 참말이라 가정하면 거짓말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거짓말이라 가정하면 참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오늘날 거짓말쟁이 역설이라 부르는 것은 이 밀레토스 철학자가 한 말의 변주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 문장은 거짓이다” 같은 문장이다. 이 문장은 또, 근원적으로는, 에피메니데스의 문장을 조금 손본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이 문장은 거짓이다” 같은, 참말인 동시에 거짓말인 문장이 나오는가?
철학자 이승종의 저서 ‘비트겐슈타인이 살아있다면’(2002. 문학과지성사)에 실린 ‘거짓말쟁이 역설의 분석’이라는 논문을 훔쳐보며 이 문제를 살피자. 이런 역설이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 문장에서 주로 나온다는 사실은 일찍부터 눈길을 끌었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에서 ‘이’는 이 문장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거짓이다. 앞 문장은 참이다” 같은 문장들은 자기 지시적이 아닌데도 거짓말쟁이 역설과 같은 역설을 낳고 있다. 그러니 자기지시적 문장을 피한다고 해서 역설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 무리의 논리학자들과 언어철학자들은 거짓말쟁이 역설을 의미론의 문제가 아니라 화용론의 문제로 보아, 진리의 개념 대신에 진술의 속성에 주목했다.
말하자면 “내 명령은 어느 것도 따르지 마시오” 같은 문장에서 드러나는 명령의 역설, “나는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같은 문장에서 드러나는 약속의 역설, “나는 내가 어떤 내기에서고 지리라는 쪽에 걸겠다” 같은 문장이 드러내는 내기의 역설 따위가 명령, 약속, 내기라는 언어 ‘행위’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발생하듯, 거짓말쟁이 역설도 ‘참이다’라는 낱말에 담긴 ‘동의’라는 행위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참이다’라는 진리 술어도, ‘명령하다’ ‘약속하다’, ‘내기 걸다’ 같은 전형적 수행동사들처럼, (어떤 진술을 주장하거나 동의한다는) 수행 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승종은 역설을 낳는 것은 진술의 속성이 아니라 진리의 개념이라고 반박한다. 명령의 역설, 약속의 역설, 내기의 역설 따위가 생기는 것도 근원적으로는 거기서 사용된 명령, 약속, 내기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명령의 개념, 약속의 개념, 내기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
그는 이를 거짓말쟁이 문장으로 확대해 중첩구조론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그는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을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동일한 두 문장이 포개진 것으로 분석한 뒤, 이 문장을 자기지시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의 진리치를 그것이 지시하는 문장의 진리치에 의존시키는 논리학자들의 이상한 태도(사용) 때문에 역설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다음 문장은 거짓이다. 앞 문장은 참이다”가 자기지시적 문장이 아닌데도 거짓말쟁이 역설 같은 역설을 낳는 것 역시 이들이 변형된 중첩구조를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승종의 생각이다.
뭔가 좀 미심쩍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비슷한 말일진 모르겠으나 논리학자 알프레드 타르스키의 가르침에 따라, 사실의 언어와 언어의 언어를 분별하지 않은 데서 이런 역설이 나왔다는 정도로 해두자.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역설의 대가 러셀
이발사의 역설… 집합론적 역설
에피메니데스의 시는 성경을 비롯한 많은 문헌에서 인용됐지만, 그것이 거짓말쟁이 문장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인솔루빌리아(풀 수 없는 문제들)라는 이름 아래 갖가지 형태의 거짓말쟁이 역설을 살피던 중세 철학자들도 에피메니데스 문장에 주목하지 않았다. 에피메니데스라는 이름이 거짓말쟁이 역설과 명확히 연결된 것은 19세기 말~20세기 초 버트런드 러셀에 이르러서다.
러셀은 그 자신 수학사와 논리학사를 뒤숭숭하게 만든 ‘러셀의 역설’을 발견하기도 했다. 역설은 크게 집합론적(수학적, 논리적) 역설과 의미론적(인식론적) 역설로 나뉘는데, 러셀의 역설은 대표적인 집합론적 역설이고, 거짓말쟁이 역설은 의미론적 역설에 속한다. 러셀의 역설이란 ‘자기자신을 원소로 갖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맞닥뜨리는 역설이다. 이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 갖는가 그렇지 않은가? 갖는다고 가정하면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 갖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갖는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러셀은 이런 예를 들었다. 어느 마을에 제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의 머리만 깎아주는 이발사가 살고 있다. 그는 제 머리를 깎게 될까 그러지 않게 될까? 그가 제 머리를 깎는다면 스스로 머리를 깎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제 머리를 깎아서는 안 된다. 한편 그가 제 머리를 깎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머리를 깎아주어야 할 사람들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제 머리를 깎을 수도 없고, 안 깎을 수도 없다.
논리학자 고틀로프 프레게의 긴 노고를 한 순간에 허물어뜨렸다는 이 역설은 손쉽게 변주할 수 있다. 예컨대 위 이발사의 난처한 처지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자서전을 쓰지 않는 사람들의 전기만 쓰는 전?작가, 저 먹을 걸 스스로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만 먹을 걸 만들어주는 요리사의 처지와 같다. 이런 직업군 대신에 단어와 숫자를 넣어 조금 까다로워진 그렐링-넬슨의 역설과 리샤르의 역설도 러셀의 역설을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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