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자들의 표정은 매우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다시 야구 얘기에 열을 올리며 볼을 주고 받았다. 나와 조성훈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늘 부러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전기 리그가 끝나갈 즈음, 그들 역시 리틀 슈퍼스타즈의 탈퇴를 통보해왔다. 그저 야구가 시들해졌다는 것이 간편하고도 담백한 탈퇴의 변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조성훈과 나, 둘뿐이었다.
나는 다시 삼미의 잠바를 꺼내 입었고, 꾸역꾸역 조성훈과 함께 그 무더운 여름의 대부분을 삼미의 잠바를 입은 채 돌아다녔다. 그 긴 팔의 잠바를 입은 채 삼미의 선수들에게 팬레터를 쓰거나, 그 답장을 기다리거나, 캐치볼을 하거나, 방수 돗자리를 널어 말리거나, 스타 카드를 정리하거나, 했다. 반장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얘기했다. “너 안 덥냐?”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지음) 중에서 부분 발췌
월드컵 개막을 1주일여 남겨둔 요즘 2002년 월드컵의 짜릿한 기억을 곱씹는 이들이 많다. 한국 대표팀에 대한 열광적인 응원과 온 국민이 하나가 된 듯한 벅찬 감정은 연거푸 일궈낸 극적인 승리의 결과였다. 하지만 스포츠란 늘 지는 팀이 있기 마련. 그렇다고 팬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풀지 못하는 의문이다. 도대체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정체성의 확인
미국 심리학협회(APS)가 발행하는 옵저버 5월호는 이 같은 스포츠 팬의 심리를 심리학자, 스포츠마케팅 전문가 등의 연구를 통해 해석했다. 먼저 스포츠 팬이 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국가나 민족, 성에 동일성을 느끼는 것과 같은 식이다. 인디애나대학의 에드워드 하트 심리 뇌과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많은 부분을 특정 팀의 팬이라는 데에 둔다.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자신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면을 끌어내는 것이 모두 응원하는 팀에 달려있다”고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직장인이고 아버지이자 가장이라는 데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듯 롯데 자이언츠와 동일시함으로써 “나는 부산 갈매기”라는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셈이다.
확대된 자아
팀 정체성은 개인의 자아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1990년대 초반 ‘성격 사회심리 저널’에 발표된 하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팀에 대한 충성도가 자신의 능력과 자존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트 교수는 대학 농구팀에 열성적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실에서 팀이 이기거나 지는 테이프를 보여준 후 각자 간단한 임무를 주고 자신을 평가하도록 했다. 하트 교수는 “팀에 충성도가 높은 팬은 팀의 승리를 곧 자신의 성공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즉 팀이 이기는 경기를 본 뒤 실험참여자들은 팀이 지는 경기를 본 참여자보다 팀의 전망, 자신이 수행한 임무나 자기존중에 대해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팀의 승패가 곧 자신의 성공 또는 실패로 인해 격려받거나 좌절하는 것과 같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트 교수는 “팬에게 팀은 확대된 자아”라고 말했다.
승리보다 소속감
스포츠 마케팅 고전에 따르면 팀 승리는 가장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다. 하지만 팀이 꼭 승리하지 않더라도 소속감을 심어주려는 마케팅 전략은 아주 효율적으로 팬을 끌어모은다.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시카고 컵스가 성공사례로 꼽힌다. 시카고 컵스는 월드 시리즈에서 거의 우승한 적이 없지만 팬이 선수들에 다가설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을 펼쳐 활발한 팬 커뮤니티를 유지하고 있다. 시카고 컵스의 팬들은 “왜 이 팀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팀 성적을 언급하지 않는다. “특정 선수가 좋다”거나 “응원하는 분위기가 좋다”는 대답이 나온다.
패배의 정당화
팀이 팬을 끌어모으는 마케팅 전략도 있지만 팬도 자신의 열정을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를 사용한다. 심지어 팀이 처절하게 패배했을 때조차 그렇다.
머레이대 심리학과 대니얼 완 교수와 웨스턴켄터키대 릭 그리브 교수는 하키 게임 후 경기장에서 나오는 148명의 팬에게 양팀 팬의 행동을 평가하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상대팀의 응원석이 더 매너가 없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높았으며, 이긴 팀의 팬들에게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자기 팀이 형편없는 경기를 했을 때 팬들은 다른 사람 즉 심판, 상대팀 선수, 팬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었다. 게임에 대한 기억도 매우 부정확했다. 팀이 곧 자신이라고 여기는 팬들은 팀이 패배할 경우 이 같은 대처전략을 활용하는 것이다.
잠시 관심사를 돌리는 방법도 있다. 다른 경기에 몰두하거나, 좋았던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의 승리를 꿈꾸는 식이다. 패배에 대한 반발로 오히려 충성도를 강조하는 방법도 있다. 팀이 졌을 때 “난 다른 사람과 달라.
모두 떠나도 난 영원한 팬이야. 언제가 우리 팀이 이기면 내가 맞다는 걸 모두 알거야”라고 되뇌이는 식이다. “팀이 질 줄 알아. 그래도 난 응원할 거야”라는 꾀를 부리기도 한다. 글 서두에 나오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들처럼 말이다.
이 모든 심리적 기제가 덧없을지라도 스포츠 팬은 영원하다. 다시 시즌이 시작되면 팬은 새로운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