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나서는데 자태가 고운 부인이 불쑥 앞을 가로막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의 처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명함을 들여다보며, ‘내가 절대 안 찍을 정당이네’ 생각했지만, “잘 부탁합니다”는 그녀의 조신한 호소에 나는 “아, 네”에 덧붙여 수고하신다는 인사까지 웅얼웅얼 건넸다.
그녀는 나와 헤어져 아랫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돈의 팔촌까지 꼽아 봐도 우리 동네 골목쟁이 같은 곳에 사는 친지는 없을 듯 한 귀부인이었다. 얌전하고 수줍어 보이는데, 남편을 위해 낯선 동네를 가가호호 혼자 방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발품은 꽤 효과 있을 듯싶었다.
골목을 걷는데 명함을 쥔 손이 거북살스러웠다. 그냥 구겨버리자니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살짝 내려놓자니 다른 사람 눈에 띄면 내가 지지하지도 않는 사람의 선거를 돕는 셈이 되겠고. 생각 끝에 그 명함을 그냥 가방에 넣어뒀다. 초면인 사람이 의례적으로 돌리는 명함을 절대 받지 않는 친구가 있다. 무례의 경지에 선 그 고지식함에 내가 다 무안했었다. 그 친구 같았으면 능히 “미안하지만 저는 다른 후보를 찍을 사람이에요”하고 정중히 명함을 돌려줬을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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