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씨의 소설집 ‘틈새’(창비)의 세상은 지금 여기의 이 세상과 틈새 없이 밀착돼 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세상살이를 새롭게 보여준다. 늘 치대며 살아온 이의 얼굴에서 무심결에 만나는 낯선 표정처럼, 특별할 것 없는 세상의 생경함은, 설명하기 힘든 뭉클함 같은 것이다.
표제작의 화자는 고향 읍내에서 가전제품 수리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사는 소박한 남자다. 어느 날 아내가 아이 다 키웠으니 가계를 거든답시고 술집을 차리더니 그예 바람이 나고, 막무가내로 이혼을 요구한다. 낯선 분노가 치민다. 종이를 꺼내 세로금을 긋고 왼편에는 ‘살아야 할 이유’, 오른 편에는 ‘죽어야 할 이유’를 적어본다. 막상 적고 보니 간명하다. 왼편에는 ‘성우’(아이 이름), 오른편에는 ‘다 끝난다. 울분도, 두려움도.’
그는 종묘상 간판에 그려진 새의 날개를 보며 자살 결의를 더욱 다진다. 자살용 농약을 사 들고 습관처럼 친구에게 들른다. 육사를 나와 출세 가도를 달리던 친구는 어느 날 낙향해 초라한 구멍가게를 열고 있다. 그는 친구가 쇠락한 이유를 묻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의 설명 역시 어이없을 만치 단순하다.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내가 찾던 길이 있다는 확신이 전류처럼 몸을 훑었어. 넌 그런 적 없었냐?” 그에게도 있었다.
바로 그 날. 종묘상 간판의 그림. “그건 새의 날개가 아니라 떡잎이었다…. 날아보지 않겠느냐고 날개를 퍼덕이던 새는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이었다. 다시 보면 새였다. 날아오르는 새,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순, 그 틈새기에 끼인 채”(135쪽)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소설집에 든 9편의 작품들은 일상의 ‘삶이 일으키는 멀미’(‘섬’)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원치 않는 간섭과 개입(‘문밖에서’), 나와 남 사이의 금 긋기(‘피아간’), ‘별책부록 같은 소망’으로 채워가는 생활에 바퀴벌레처럼 불쑥 찾아드는 위기와 두려움(‘망태할아버지 저기오시네’)…. 작가는 이 그늘들을 정밀화처럼 촘촘히, 수채풍경화처럼 투명하게 담아낸다.
10년 전 작가는 어느 문학상 수상 소감으로 이렇게 썼다. “세상 밖으로 달아나던 어느 오후, 시장에서였다. ‘내 손이 이렇게 커지는 걸 보니, 아가씨가 무척 허기졌나 보우.’그러면서 떡 장수가 내민 떡은, 치른 값의 두 배는 되는 분량이었다. 그 떡이 간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임을, 어떻게 알아본 걸까. 사람의 허기를 눈밝게 알아보고 어루만지는 손, 내가 쓰는 글이 그런 것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으로 그의 바람은 거의 이뤄진 듯하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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