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화월(花月)은 비단 주렴을 걷어 달빛을 방안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녀는 쓸쓸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더니 ‘달은 밝고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라 했다.
함께 대동문 성루에 올랐다.…그녀는 은비녀를 뽑아 난간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는 구슬을 꿴 듯 청아하게 반공에 솟아 감돌았다. 모래밭의 갈매기는 깜짝 놀라 날아오르고 지나가던 구름은 멈춰서 노래를 듣는 듯 하였다. …깎아지른 벼랑 밑에는 배 한 척이 외롭게 머물러 있었다. 머리 허연 늙은 어부가 밤이 이슥토록 잠자지 않다가 일어나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19세기 전반 평양의 기생 67명과 기방 주변의 남성 5명의 삶을 그린 산문 소품 ‘녹파잡기’(綠波雜記)가 25일 공개됐다. 평양은 옛적‘색향’(色鄕)으로 불리던 곳으로, 책 제목의 ‘녹파’는 고려 중기의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평양을 무대로 쓴 시 ‘송인’(送人) 중 마지막 구절‘별루년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에서 딴 것이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가 찾아 낸 이 책은 개성 갑부의 자손으로 신위(申緯) 등과 교유가 깊었던 문사 한재낙(韓在洛ㆍ생몰연대 미상)이 평양의 내로라 하는 기녀들을 직접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우리 기생사를 체계화한 이능화(李能和)도 보지 못한 책으로, 풍속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67명의 기생은 환락적 풍모나 ‘성 노리개’식의 부정적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뛰어난 기예를 가졌고, 서화를 겸비한 예술인이었다. 신위가 평했듯 “붓으로 노래하고 먹으로 춤을 대신하는” 이들이었다.
“영희(英姬)는 빼어난 미모에 가무를 잘하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다. 주렴을 걸고 서안(書案ㆍ책상)을 놓고, 자기와 서화를 진열하고 온종일 향을 사르며 단정히 앉아 있다. 방문 앞을 지나가도 적적하여 사람이 없는 듯 하다. 난초 그리기를 즐겨 옛사람의 필의(筆意)를 깊이 터득했다.” “패성춘(浿城春)은 아리땁고 멋진 사람으로 부용꽃이 막 핀 듯 향기로운 기운이 온 좌석을 뒤덮는다. 마침 달이 환한 밤이었다. 그녀는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한 조각 구름인양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줄풍류와 대풍류가 번갈아 연주되고 청아한 노래가 들보를 감쌌다. 최원경의 노래, 홍한조의 요고, 김자열의 피리, 박을축의 퉁소, 김창렬의 거문고가 함께 했는데 한 시대 최고의 음악가들이었다.”
의로운 기생, 멋진 풍류를 가진 기생들도 소개된다. 차앵(次鶯)은 비록 자신은 거친 옷을 입고 박한 음식을 먹었지만 굶주리고 헐벗은 이들에게 음식을 주고 옷을 벗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죽엽(竹葉)은 한재낙과 묘향산 유람을 약속하면서 말했다. “아아! 제 나이 벌써 스물넷이랍니다. 언젠가 사내를 만나게 될 테고 속박을 받게 되겠지요. 그러면 어찌 제 꿈을 이룰 수 있겠어요. 마땅히 봄 가을 좋은 날 명승지를 골라 거문고를 안고 마음껏 노닐어 늙지 않은 이 시절을 놓치지 말아야지요.”
특별한 기예나 일화를 소개하지 않은 기생도 개성적인 아름다움은 빼놓지 않고 묘사했다. “영주선(瀛洲仙)은 가는 눈썹에 도톰한 뺨, 담담한 말씨에 은근한 미소가 일품이다. 봄날 난간에 기대어 슬픈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은 무언가를 그리워 하는 듯 하다.” “경연(輕燕)은 복사꽃이 얼굴에 서려 있고, 곱고 세련된 자태가 뛰어나다. 노을빛 치마는 가볍게 바람에 날리고 구름 같은 머리는 드높다.”
이밖에 평양 명기 예닐곱이 각기 맘에 맞는 남자를 데려와 잔치를 벌이기로 해 다른 기생들까지 호기심에 구름처럼 모였는데 알고 보니 명기들이 모두 그 하나를 초청했다는 전설을 남긴 진사 안일개(安一個), 기생집 청소부에 불과했지만 그가 청소를 해주느냐 여부에 기생의 명성이 오르내렸다는 최염아(崔艶兒) 등 평양의 특이한 명사 5명도 소개돼 있다.
안 교수는 “화려한 듯 보이는 기생들의 이면에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인간성이 있음을 포착해 오히려 진정한 인간다움이 구현돼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라며 “홍등가의 실존 인물 수십 명을 이렇게 직접 묘사한 사례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만큼 당시 기방 문화와 기생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생활사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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