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 이듬해인 1960년 3월, 혁명군의 탄약을 가득 싣고 아바나항에 입항한 프랑스 화물선 ‘라 쿠브르’호가 갑자기 폭발한다. 34살의 혁명 영웅 피델 카스트로가 그 배후로 미국 CIA를 지목한 이 사고로 항구 노동자 81명이 사망했다. 쿠바의 인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가 배석한 희생자 장례식장 단상에 ‘그’가 있었다. 훗날 사르트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라고 추앙했던 ‘체 게바라’.
그 날 그의 모습을 담은 이 한 장의 사진은, 이후 세계 진보 운동의 깃발로, 좌파 운동가의 상징으로, 그리고 씁쓰레하게도, 금세기 최고 히트 문화 상품의 도안으로, ‘사진 역사상 가장 많이 복제된 20세기의 아이콘’이 됐다. 사진가이자, 혁명 정부 기관지 ‘혁명’의 기자였던 알베르토 코르다(1928~2001)는 그 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검은 장막이 쳐진 연단 아래에서 나는 라이카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고정시키고 피델과 그 주변인물을 마구 찍어대고 있었다. 그때 90㎜ 망원 렌즈 안에 체가 불쑥 나타났다. 나는 그의 시선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 희대의 사진은, 하지만 당일자 ‘혁명’지에 실리지 못했고, 그의 사후 체의 일기 출간과 홍보 포스터로 제작 배포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 사진으로 한 푼의 저작권료도 챙기지 않은 코르다였지만, 단 한 번 시비를 건 적이 있다고 한다. 2000년 러시아의 한 보드카 회사가 자사 광고에 이 사진을 도용하자 ‘체의 품위를 떨어뜨린다’며 회사를 고소, 5만 달러를 받은 것이다. 그는 이 돈을 쿠바 의료복지재단에 전액 기부했다.
‘코르다의 쿠바, 그리고 체’(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13,000원)는 코르다가 사망하기 직전 기획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집이다. 코르다의 사진 80여 점에다 그의 동료였던 크리스토프 로비니 등이 회고담 등을 엮었다. 코르다는 이런저런 행사장을 찾아 다니며 무단으로 사진을 찍은 뒤 그 사진을 파는 이른 바 ‘랑비오’로 사진 일을 시작, 감각적 에로티시즘의 패션 전문 사진가로 활동하다 혁명과 함께 피델과 인연을 맺는다.
밀림과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 속을 누비는 게릴라(혁명군)를 찍기 위해 “항상 대열의 맨 앞쪽으로 가야만 했”고, 그런 그를 두고 초기의 피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친구 좀 보게나. 저 말라깽이는 도무지 지칠 줄 모르는 군.”(34쪽)
그는 피델의 공식 사진 기자가 아니라 개인 사진사였고, ‘친구’였다. “나는 어떤 직함도 없었고 월급도 받은 적 없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76쪽) 아바나 혁명 광장에, 지방 순시에 그는 피델과 함께 있었고, 미국의 쿠바 봉쇄와 핵 위기 등 혁명 직후의 쿠바 위기를 함께 지켜봤다. 그리고 거기에는, 코르다가 “강철의 강인함과 장미의 부드러움을 겸비한,… 늑대 인간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간을 기원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한 체도 있었다.(65년 3월 ‘콩고’로 떠나기 전까지.)
책에는 혁명 직후 사르트르, 보바리와 담소하는 체, 골프와 낚시, 스키와 잠수 등으로 휴식을 즐기는 두 혁명 영웅의 익살스러운 모습, 기름때와 흙먼지 투성이 얼굴로 신형 사탕수수 수확기를 시운전하는 산업부장관 시절의 체, ‘헤밍웨이 낚시 대회’에서 악수하는 헤밍웨이와 피델,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는 게 낫다”는 말을 남긴 스페인 출신 여전사 ‘파시오나리아’(본명 돌로레스 이바루리)와의 정담, 그 자신 한 때 사진기자로도 일한 바 있는 체가 바다낚시 도중 카메라를 매만지는 장면(사진 맨 아래)과 그 뒷얘기 등이 수록돼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찰나의 셔터로 혁명의 정신을 구현했던 코르다의, 사진으로 말하는 자서전이고, 그가 함께 했던 혁명 쿠바의 이야기다. 그리고, 총을 든 위대한 휴머니스트 체와 젊은 혁명가 피델의 이야기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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