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대에 한국 의학의 긍지를 떨친 ‘작은 거인’이 스러졌다.
22일 뇌수술 끝에 깨어나지 못한 채 숨진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160㎝ 단신으로 일국의 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한국인 최초의 유엔 산하 국제기구 수장이었다.
그는 2003년 1월 WHO 사무총장에 당선돼 7월 공식 취임한 뒤 연간 예산 22억달러(약 2조6,400억원), 전문 직원 5,000여명에 이르는 유엔 산하 최대 국제기구를 3년여 간 이끌어 왔다.
고 이 총장은 재임 기간 전세계에 번질 위기에 처했던 조류인플루엔자(AI)를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2004년 타임지가 선정한 100인에 드는 등 명성을 떨쳐왔다. 지난해말 고 이 총장을 만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훌륭한 공직자”라는 칭찬과 함께 AI 확산을 막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서울 경복고를 나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고 이 총장은 미 하와이대에서 역학 석사를 딴 뒤 평생을 의료봉사활동과 의료행정에 전념했다. 이 총장은 서울대 재학시절 경기 안양시 나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고, 이곳에서 함께 봉사활동을 한 일본여성 가부라키 레이코(鏑木玲子)씨를 만나 결혼했다.
고 이 총장은 1976년 대학을 졸업한 뒤 개업하지 않고 부인과 함께 태평양을 건너 피지로 향했다. 빈곤 환자에 대한 봉사인생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그가 WHO와 인연을 맺은 것은 83년 피지에서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 나병자문관으로 근무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후 WHO 질병예방관리국장 예방백신사업국장 정보화담당팀장을 거쳐 결핵관리국장을 지냈다.
그는 결핵관리국장 재직 당시 북한에 6만명 분의 결핵약을 공급하는 등 19개 국가의 결핵퇴치사업에 매진했으며 예방백신사업국장 시절에는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 인구 1만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올려 ‘백신의 황제’ 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고 이 총장은 청빈하기로도 유명하다. 그는 평생 집을 소유하지 않았으며, 제네바에서도 명성과 어울리지 않게 소형 임대주택에서 지내 각국 지도자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3월 대북지원을 위해 잠시 내한했던 그는 기자들 앞에서 “남은 임기(2008년 7월)동안 AI 퇴치를 위해 매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런 그가 임기도 다하지 못한 채 영면의 길로 떠난 22일 밤 고국에 내리는 빗줄기가 거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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