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소풍을 다녀왔다. “어디로 갔었니?” 옛날, 소풍 가는 날의 설렘을 기억하며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자못 놀라왔다. “찜질방이요.”
한동안 나는 말을 잊지 못했다. 찜질방이라!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그런 데를 소풍이라고 간단 말인가, 하고 호들갑을 떨기에는 뭔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을 것 같았고, 어떻게 그런 곳으로 소풍을 보낼 수가 있지, 라며 막무가내로 분개한다면 덜떨어진 학부모의 심사를 너무 쉽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선생님도 함께?” “당연하죠.” 으흠, 곤혹스럽다.
● 피자집·노래방… 달라진 소풍
요즈음 소풍은 어릴 적 전교생이 차례로 손을 잡고 떠나거나 한꺼번에 한곳에 모이는 행사가 아니다. 학급별로 장소를 자율적으로 정하고 모이는 것도 각자 알아서 하는 모양이다. 물론 선생님의 추인이 있어야 하지만 학생들의 자율성과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진일보한 교육현장이다.
어떤 학급은 동숭동으로 연극을 보러갔고 어떤 학급은 계곡에 가서 고기를 구어 먹었단다. 아이의 학급은 찜질방에 가서 네 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가 피자집에 가서 피자를 먹었으며 그 뒤 해산하여 우리 아이는 친구들과 노래방을 갔다.
찜질방과 피자집과 노래방을 도저히 소풍의 장소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아이들의 선택을 받아들인 선생의 심오한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우리의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시작해서 갖가지 환상적인 탈 것이 가득한 놀이동산, 도무지 현실세상에는 있을 것 같지 않은 곳들을 소풍이란 이름으로 두루 섭렵했다.
그렇다면 혹시 환각적인 놀이공원의 연장선에서 이 세계가 의사현실로 가득하며 그것은 자본의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짜인 거대한 스펙터클로 이어져 있고 그것이 이 아이들이 장차 맞닥뜨릴지도 모를 매트릭스의 세계라는 것을 미리 충분히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 이건 분명 아닐 테고, 그렇다면 찜질방은 이제까지의 꿈과 환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현실의 공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까? 벌거벗은 육체와 정신이 드러나는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과 행동양식에 대한 문화연구의 차원에서 결정된 것일까?
이건 도무지 소풍에 걸맞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 내가 소나무들이 늘어선 어느 왕의 무덤가에서 삶은 달걀과 김밥과 사이다를 먹었던 추억으로 소풍을 기억하듯이, 미래의 아줌마들이 될 아이들에게 한때 찜질방이란 게 있었고 거기서 피자를 나누어 먹었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지 하며 옛날을 회상할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을까?
● 선생님의 심오한 뜻 나만 모르나
그도 아니면 입시에 찌든 아이들에게 그 날 하루쯤은 어른들의 가벼운 일상적 일탈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기분을 전환시켜주기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그저 아이들의 자율적 결정에 빌붙어 골치 아플지도 모를 소풍날 하루를 통제가 비교적 쉬운 찜질방에서 편안하게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딸아이는 소풍을 가볍게 다녀왔는데 그걸 바라보는 나는 도무지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김진송 목수ㆍ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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