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5ㆍ31 지방선거 만큼 정책선거를 하자는 목소리가 높은 선거도 드물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책이 선거 판을 좌우한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고착경향을 보이고 있는 한나라당 압도 판세를 만든 것은 지역구도와 정권 심판론이다. 매니페스토(참 공약 실천하기) 운동과 같은 좋은 시도들이 아직은 머쓱한 상황이다.
지난 12일 밤 여야5당 대표가 TV 정책토론회를 했다. 어떤 주제건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토론을 한 것은 17대 국회 들어 처음이고, 거기엔 차기 대선후보도 2명이나 끼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2.2%~4.5%에 머문 시청률은 차치하더라도, 시선을 잡은 토론다운 토론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대표들이 나섰는데도 이 지경이니 선거 현장에서 정책이 갖는 비중이란 훨씬 왜소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야가 이슈가 될 만한 정책을 내놓지 않은 데 있다. 대개 재탕, 삼탕이거나 길 닦아주고, 시설 지어주겠다는 고리타분한 내용들이다. 기껏 논쟁이 돼봐야 예산이 얼마나 들 것인가의 수준이다. 이런 것으로는 대중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정책이 선거에서 표가 되려면 폭발력이 있어야 한다. 거센 찬반 논란을 불러 사회와 지역의 이슈가 돼야 한다는 게 과거 선거의 경험이다. 2002년 대선 당시 행정수도를 충청도에 건설하겠다는 노무현 후보의 공약이 대표적이고, 같은 해 지방선거 때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의 청계천 복원 공약이 그랬다.
이들 공약엔 찬성하는 사람만큼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두 후보는 개의치 않았다. 선거에서 논쟁을 유발하고 반대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은 어느 후보든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정책으로 표를 얻겠다는 것은 공짜 심리다. 남과 다른 물건을 만들어내고야 말겠다는 치열한 문제의식과 통찰력, 그리고 정치적 담력이 정책선거의 필수 요건이다.
2001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당 소속 대부분 의원과 각 분야의 유수한 교수들이 참여한 국가혁신위를 발족한 뒤 1년 후 ‘국가혁신 보고서’를 내도록 했다. 구성원의 수준으로 본다면 쉐도우 내각이라고 할만 했지만, 그들이 심혈을 기울인 보고서가 대선에서 표를 끌어왔다고 보는 이는 별로 없다. 폼 나는 정책만 있지, 이슈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노 후보의 행정수도 공약 한방에 잊혀진 이유도 마찬가지다.
물론 복잡해 보이는 미래비전 보다 정치공방에 익숙한 대중,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택하기 보다 재미있는 이슈에 관심을 빼앗기는 대중의 행태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이다. 그러면 안 된다고 대중을 가르치려 들다간 돌팔매를 맞아 선거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대중을 상대로 진짜 정책선거를 하려면 종래의 방식으론 어림도 없다. 상대가 한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죄다 흉내내려는 물량주의, 누구나 동의하지만 특별한 관심도 끌지 못하는 지당하신 말씀, 이미 다 드러난 여야간 노선차이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정당과 후보자가 적당주의, 면피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정책선거 외침은 앞으로도 한낱 소음일수 밖에 없다.
유성식 정치부 차장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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