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大勢)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사회현상이나 역사발전의 대세는 부분적 저항이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잘 뒤집히지 않는다. 근원적 요인이 그 쪽으로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 인신공격·폭로 영향력 상실
5ㆍ31 지방선거는 정책공약 대결이 대세로 굳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도 정책공약이 선거에서 강조되었지만 요즘처럼 핵심적 위치에 오른 적은 없다. 대부분의 입후보자는 구체적 정책공약의 준비와 홍보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자기를 부각시켜줄 대표 정책공약을 개발하느라고 부산하다. 입후보자들 간의 대결도 주로 정책공약과 관련해 이루어지고 있다. 언론도 유례없이 정책공약 비교에 주안점을 두고 있고, 시민단체들도 정치적 판단에 따른 낙선 운동보다는 정책공약의 검증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물론 공약선거를 가로막는 각종 방해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지역감정이나 지연ㆍ학연에 호소하는 구태는 전보다 많이 줄었지만, 말꼬리 잡기 식의 비방전은 그 도가 약해진 것 같지 않다.
문맥을 무시한 채 몇 개 단어를 끄집어내어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을 할 때 정책공약 대결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을 아전인수 격의 법적 해석으로 위협하고 사법적 징계 대상으로 몰아붙여 정책 논쟁을 힘들게 하는 행태는 더 늘어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런 방해물은 대세 앞의 부분적 저항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예전 같으면 선거판을 뒤바꿀 수도 있었을 말꼬리 잡기 식 인신공격, 비리 폭로, 사법적 위협 등이 선거 분위기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 각 후보에 대한 지지도에 별 영향을 못 미치고 있다.
공약선거 풍토가 이처럼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여러 요인의 덕택이다. 그중 하나로 매니페스토(참공약) 운동을 들 수 있다. 처음엔 외국 사례에 주목한 몇몇 학자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 운동이 선관위의 지지를 받더니 이제는 언론사와 시민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탄력을 받고 있다. 매니페스토 운동의 한계와 현실적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지방선거가 구체적 공약 중심으로 진행되게 하는 데 직접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매니페스토 운동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이 있다. 바로 국민의식의 변화다. 우리 국민은 선거 때마다 난무했던 인신공격, 흑색선전, 폭로전, 법적 공방에 이제는 식상해졌다. 워낙 정치문제가 많다보니 웬만한 것엔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근거없는 비방전에 현혹된 적 있던 과거 경험에 의한 학습효과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매우 깊어 무언가 새로운 정책공약을 절실히 염원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탈산업시대를 맞아 사회의 전반적 합리화에 영향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든 요즘 국민 사이에는 선거가 정책공약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퍼져있다. 이런 국민의식, 즉 사회분위기의 변화가 없었다면 몇몇 전문가에 의한 매니페스토 운동이 널리 공감을 자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공약선거가 대세로 굳어진 이면에는 이처럼 국민의식의 변화라는 근원적 원인이 있다.
● 국민 의식 변화가 큰 힘
정책공약 선거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때론 구체적 정책보다 이념이나 정당 요인이 선거를 이끌어야 거시적 비전 제시와 개혁적 변화가 가능할 수 있다. 때론 공약선거가 거대 담론보다는 지엽적 논쟁만 양산하기도 한다. 공약의 실현성은 차치해도, 공약 남발이 선거 후 국정 운영의 융통성을 저해하고 열린 토의를 어렵게 하기도 한다. 학자나 일반시민이 공약선거의 장단점을 균형있게 평가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 있다.
그렇지만 선거 승리라는 현실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은 공약선거라는 대세를 따라야만 하지 않겠는가. 국민의식 변화에 따른 대세를 거스르고 구태를 반복한다면 결국 정치생명은 이어질 수 없다.
임성호ㆍ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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