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산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김근원(1922~2000)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하지만 더욱 드문 것은 그의 사진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김근원의 사진 작품들은 보았으되, 그것을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세 권의 산악 전문 월간지에 거의 매달 빠지지 않고 실린다. 오직 흑백만으로, 혹은 빛과 그림자만으로 묘사된 한국의 산하를 본 적이 있는가? 실경 산수가 수묵화와 추상화 사이에서 절묘하게 빛을 발하는 사진 작품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 바로 ‘한국 산악사진의 아버지’ 김근원이다.
김근원이라는 이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역사 속의 한 페이지처럼 인식되어 왔다. 그의 산악사진 활동이 곧 한국 현대 등반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사진을 보며 자라온 나는 어느 날 문득 그가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이한 문화적 충격 같은 것을 느꼈다. 마치 역사 속의 인물이 현실 속으로 성큼 걸어 나오는 놀라운 장면을 목도한 것 같은 충격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수년 전 이곳을 떠나 실제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만 그가 남긴 작품만을 통하여 그의 산 사랑과 예술혼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생전의 그를 단 한번 뵌 적이 있다. 전시회장에서 먼 발치에서나마 바라본 것은 여러 번 되지만 서로 얼굴을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본 것은 꼭 한번 뿐이었다. 당시의 나는 어찌어찌 하여 그의 촬영산행의 말석에 끼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김근원은 매우 왜소하나 다부진 할아버지였다. 그가 사용하던 카메라들 역시 고색창연하고 무거운 애물단지(!)들 뿐이었는데, 그것들의 엄청난 무게가 저 양반을 짜부러뜨리지나 않을까 싶어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그는 니콘과 롤라이 플렉스, 그리고 아사히 펜탁스와 린호프 테크니컬 등을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생면부지의 젊은 청년이었던 내게 카메라 배낭을 맡긴 것이 못내 미심쩍었던지 자꾸뒤돌아 보면서도 쉬지 않고 능선을 향해 전진했다. 이윽고 그가 남 몰래 점찍어두었던 촬영포인트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원두커피를 내리는 일이었다. “무겁지? 이거 한잔 마셔.” 그가 내게 건넸던 유일한 말이다.
나는 그 때 한잔 얻어 마셨던 ‘김근원 선생표 커피’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커피 몇 잔을 맛있게 비워낸 그는 이내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촬영 준비를 했다. 결코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라면 내세에서까지라도 기다릴 용의가 있다는 듯 느긋하고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어느 새 일몰 시간이 다가오자 산에 짙은 음영들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 앉아 있는 김근원의 모습은 이미 산과 하나가 되어 있는 풍경이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한 컷이다.
김근원은 1922년 경남 진주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그의 집안 어른들 대부분이 투옥되는 쓰라린 체험을 한 끝에 서울로 이주한 것은 그의 나이 13세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그가 진학한 학교는 엉뚱하게도 경성음악전문학원이었다. 그가 한 일본인 사진작가로부터 본격적으로 사진 수업을 받은 것도 이 즈음이다. 엄격했던 일본인 선생은 당시 그에게 1년 내내 계란 사진만 찍게 했다고 한다. 지겹고 끔찍했던 수업 기간이었겠지만 훗날 김근원은 회고한다. “계란의 형태는 곧 바위의 형태가 되었고, 계란의 색은 곧 눈의 색이 되었다.”
그 다음 1년 동안은 인화술만 배웠다. 타고난 음악광인 그는 인화를 할 때 클래식 음악을 크게 듣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진 작품들이 뿜어내는 간결하되 장중한 느낌은 어쩌면 이 과정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본격적으로 산 사진에 매달린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부터였다. 그는 1956년 한국산악회에 입회하게 되었는데, 평생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초기작들은 대개 한국산악회와 함께 한 등반이나 탐사의 보고 사진들이었다. 1956년의 ‘울릉도 독도 보고전’, 1957년의 ‘스키사진전’과 ‘한라산 등반 보고전’, 1960년의 ‘설악산 등반 보고전’ 등은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학술적 가치도 빼어난 소중한 기록들이다.
사진작가로서의 첫 번째 개인전은 산악 사진에 매진한지 20여년 만에 열린 1976년의 ‘북한산’ 전시회다. 이 즈음에 그는 이미 일가를 이루어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펼쳐보였다. 그리고는 작고 직후인 2001년의 회고전에 이르기까지 16회의 개인전을 열어 우리가 늘상 오르내리는 한국의 산하들을 최고의 예술품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김근원의 사진 작품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숭고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더 없이 ‘한국적’이遮?것이다. 그의 산은 요세미테도, 알프스도, 히말라야도 아니다.
끝없이 중첩된 야트막한 산들, 치솟은 바위조차 풍광 속에 녹아들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산들, 고사목과 운무 저편에 꿈결처럼 펼쳐지는 산들, 바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의 산들이다. 김장호가 글을 통하여 “우리의 산이야말로 명산”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면, 김근원은 사진을 통하여 그 위업을 이룩해냈다. 그가 그려낸 산들은 부박한 세태의 저편, 피안의 어느 경지에 속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근원적인 그리움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한국의 산은 그의 사진을 만들었고, 그의 사진은 다시 우리들을 산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 代이은 산사랑
아들 김상훈씨도 사직작가… 아버지 작품으로 사진집 출간
산사진에 대한 김근원의 지독한 사랑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그의 아들인 김상훈 역시 산악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선친의 작업들을 정리하고 계승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한때 산악전문 월간지의 사진부장을 역임한 그가 김근원과의 공동작업으로 펴낸 책이 '산악사진-이론과 실제'(1995)인데, 아직도 이 분야에 관한 한 최고의 저서로 손꼽히고 있다. 당시 김근원은 이 책을 출간한 직후 "사진전 열 번 여는 것보다 힘들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김근원의 사후에 몇 권의 사진집들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모두 김상훈의 노고에 의한 것이다. '김근원 산악포커스'(2003)와 '한국 스키의 발자취'(2003)는 편저자의 이름이 김상훈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 책 안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김근원의 작품들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찍은 사진들은 예술성 못지않게 기록성도 높은 희귀작들이다. 다만 이 두 권의 책은 인쇄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김근원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김근원의 작품집들 중 가장 아름다운 책은 1987년에 출간된 '한국의 산'이다. 하지만 한정판으로 출간된 이 책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덕분에 그의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매달 산악전문지에 실리는 유작들을 띄엄띄엄 살펴보며 입맛을 다져야만 했다. 그런 뜻에서 최근에 출간된 '산, 그 숭고한 아름다움'(2005)는 김근원 매니아들에게 매우 반가운 선물이다. 좋은 종이에 제대로 된 인쇄로 나온 이 책을 현재 구할 수 있는 김근원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무방할 듯 하다. 이 책의 편집자 역시 김상훈이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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