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방송작가 한 명이 다음 주에 독일로 떠난다. 월드컵 특집방송 준비를 위해서다. 축구 중계팀도 아니고 다큐멘터리 제작팀도 아니다. 평범한 정보교양 프로그램 제작팀이다. 자료 수집이나 인터뷰 정도를 위한 출장이 아니다. 월드컵 기간 동안 현지에서 방송을 한단다. 나름대로 기획도 하고 사전 취재도 했지만 어떤 아이템을 골라 어떻게 요리할지 걱정이 많다고 한다.
장르나 시간과도 무관하다. 월드컵 개막 D-100이라고 특별방송을 하고, D-50이라고 특집을 만들고, 이제는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수험생처럼 하루하루를 세어가면서 월드컵 방송을 준비하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방송사들이다. 뉴스에도 어김없이 월드컵 관련 소식이 한 꼭지씩은 준비되고, 이미 광고는 축구공과 붉은 옷이 점령한지 오래다.
왜 그렇게 야단법석인가? 시청률 때문이다. 무슨 프로그램이건 월드컵이 관련되면 방송인들의 성적표인 시청률은 조금이라도 오르기 때문이다. 점수를 1점이라도 올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자세가 되어있다는 점에서 고3 수험생과 유사하다. 방송은 월드컵에 들떠있는 사람들의 기호를 반영할 뿐이라지만, TV가 사회 분위기나 여론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구성하는지에 대한 덧없는 논란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TV는 사회 내 일부 집단보다는 반 발자국 느리고 절대 다수보다는 반 발자국 앞서 간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리라. 사회의 일부로부터 앞날 경향의 단초를 발견하여 이를 다수에게까지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일부 마니아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트렌드를 발탁하고, 포장하고, 소개하고, 나아가 다수로부터 인기를 모으는 대중문화의 일생은 대중적 기호의 부침을 잘 설명한다. 공익에 대한 의무를 갖는 지상파 방송사가 수많은 월드컵 특집의 이유를 대중의 기호로만 돌리는 것은 안이한 핑계다.
황우석 사태도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장사’가 되고 ‘이문’이 남을 듯하니 떠들썩하게 스타를 만들어내고는, 나중에는 다수 시청자들의 바람을 좇는다며 대중적 기호에 영합했다. 다가올 지방선거도 마찬가지다. 이미지로 투표하는 유권자들 앞에는 정치인의 이미지로 장사를 하던 방송사들이 있었다. TV는 세태를 철저하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변명하기 이전에 자신들이 만들어낸, 혹은 만들어낼 세태에 대해 책임감 있는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월드컵이 무척 기다려진다. 하지만 스포츠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주위의 몇몇 사람들을 보면, 월드컵 기간 중 우리나라 방송사들이 이들에게 무슨 일을 해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돌리는 채널마다, 시청하는 프로그램마다 붉은 색으로 도배가 됐다며 넌더리를 내는 사람들은 시청자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과연 정당한가? 재난이 일어났거나 국가 위기사태라면 방송사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할 필요와 의무가 있다.
축구는 아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시청자가 다수라는 이유로 나머지 사람들의 TV 볼 권리를 빼앗는다면, 그리고 시청자 하나하나를 시청률 올려주는 숫자로 생각한다면, ‘이문’을 남기기 위해 손님을 가려 받는 음식점과 다를 바 없다.
2002년, 예기치 않게 4강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하루 만에 기획해서 이틀 만에 제작한 특집물들이 TV를 가득 메웠었다. 그 엉성한 프로그램들에 대해 반성도 많이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올해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빡빡한 중계권 조항 때문에 경기장 내 스케치 촬영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많은 프로그램 제작팀들은 독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월드컵 열기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광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축구를 모르는 적잖은 사람들을 방송사가 나서서 ‘이지메’ 하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방송사들은 이제라도 침착하게 의무와 필요를 따져보길 바란다. 스스로를 장사치로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방송사들의 책임감 있는 결정을, 그리고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월드컵 기간을 기대한다.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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