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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11> 홍희담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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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11> 홍희담의 '깃발'

입력
2006.05.1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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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담(61)의 중편소설 ‘깃발’은 1988년 ‘창작과 비평’ 봄호(복간호)에 발표되었다. ‘깃발’은 작가가 2003년 창비사에서 낸 소설집의 표제가 되기도 했다. 과작의 늦깎이 작가라는 사정도 겹쳐서, 그 뒤 이 작품은 소설가 홍희담의 브랜드가 되었다. ‘깃발’이 그리는 것은 1980년 봄에서 가을까지의 광주다. 세 장(章)으로 이뤄진 이 소설의 앞 두 장은 5월18일에서 27일까지의 민중항쟁을 엿보고 있고, 마지막 장은 살아남은 자들의 여름과 가을에 눈길을 건넨다.

‘깃발’은 첨예하게 당파적인, 뾰족이 벼려진 계급의식의 언어다. 항쟁의 보고자로서, 작가가 두둔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 계급이고 그가 타박하는 사람들은 지식분자들이다. 지식분자들은, 작가가 보기에, 미덥지 않은 기회주의자이기 십상이다. 지식분자들이 기회주의자가 되기 쉬운 것은 그들에게 가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사람을 잘 기억해 둬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드는지 알게 될거야”

‘88년 시각’ 한계 불구 작품으로 움켜쥔 진실… 항쟁의 주체는 바로‘프롤레타리아’ 라는 것을…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에 대한 작가의 시선도 그래서 곱지만은 않다. 항쟁 이전의 광주 지역 노동운동을 엿살피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노동현장에 들어온) 여대생들은 (쫓겨나도) 그들 세계로 갈 곳이 있었지만 쫓겨난 근로자들은 갈 곳도 없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어느 곳에도 취업할 수가 없었다.”

소설 속의 긍정적 인물들을 대표하는 이는 제사(製絲)공장 노동자 형자고, 부정적 인물들을 대표하는 이는 노동자들을 가르치는 강학(야학 교사) 윤강일이다. 진압군이 광주 시내로 다시 진입하기 하루 전인 26일 저녁어스름에 형자가 후배 노동자 순분과 나누는 대화는 이 소설의 세계관을 압축하고 있다.

이 두 여성노동자는 금남로의 전남도청과 분수대 사이에 서 있다. 말 없이 주변 사물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건네는 형자에게 순분이 묻는다. “언니, 뭘 생각해?” 형자는 낮은 신음소리를 낸 뒤 “분수대 앞과 와이더블류씨에이, 그리고 도청”이라고 대답한다.

당연히, 순분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형자가 다시 말을 잇는다. “순분아 생각해봐.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의 선택을. 분수대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야. 와이더블류씨에이는 언제든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그리고 도청은…” 순분이 다급히 묻는다.

“도청은?” 형자는 도청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한다. “도청은 죽음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것이야.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지.” 형자는 제 죽음을 당위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날 밤 도청에 남는다. 그녀에게 자유는 “무한히 열려 있는 가능성 앞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분명한 당위”를 뜻했다. 하나의 상황 앞엔 하나의 결정만이 있을 뿐이었다.

윤강일은 운동권 지도부에 속해 있는 인물이다. 그가 입에 달고 사는 말들은 혁명, 비지(부르주아), 피티(프롤레타리아), 전사(戰士), 빨치산, 무장투쟁, 계급투쟁, 시가전, 유격전, 죽창, 게릴라, 봉기, 제국주의, 자본주의, 주변부자본주의, 종속이론, 해방신학, 제3세계, 민중, 프랑스혁명, 빠리꼼뮨, 러시아혁명, 레닌, 볼셰비키, 베트남, 통일 따위의 ‘매력적인’ 언어다. 그는 항쟁 초기, 시위대를 선동해 MBC 건물을 불태운다.

그러나 진압군이 발포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며 광주를 떠난다. 형자는 분노에 차 항의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선생님들이 말하던 시가전, 봉기 등등이 나오고 있는데….”

그렇게 지식분자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채웠다. 진압 전날 밤 떠밀려 도청을 빠져나온 순분의 회상 속에서, 그 밤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말없이 눈만 번쩍이던 사람, 턱에 칼자국이 있던 사람, 거친 욕을 끊임없이 해대던 사람, 몸집은 작은데 손이 유난히 컸던 사람, 밥을 먹으면서도 총만은 거머쥐고 있던 사람, 해맑은 어린 사람, 사람들”이다.

소설 도입부에서 순분을 도청까지 자전거로 태워준 중국집 배달원 김두칠이나, 순분에게 유언처럼 계급의식을 불어넣은 형자를 포함해, 그들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다.

모두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순분은 형자의 유언을 잊지 않는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를… 그것은 곧 너희들의 힘이 될 거야.”

작가는 소설 뒷부분에서, 서울로 피신했던 윤강일이 광주에 돌아와 순분과 그 동료들에게 제 몸을 의탁하는 장면을 묘사하며 지식분자의 기생적 성격과 민중의 너른 품을 다시 한 번 맞세운다. 戮岾?겪은 순분과 그 동료들은 이제 윤강일에게 예전의 고분고분한 ‘제자’가 아니다.

윤강일이 제 동료 상원(아마 항쟁 마지막 밤 도청에서 산화한 실존인물 윤상원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의 죽음을 내세우자, 순분은 “죽음조차도 윤선생님 쪽의 사람만 부상하는군요”라며 타박한다. 윤강일이 아무래도 자기는 이 도시를 떠나야 할 것 같다며 “커다란 획이 확 그려지고 지나갔어”라고 하자, 순분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있지요”라고 되받는다.

순분의 한 동료도 “난 노동자라는 게 자랑스러워”라고 고백한다. 윤강일이 잠든 뒤, 순분이 동료들에게 말한다. “시작이야. 없는 사람들이 끝까지 책임지고 투쟁을 했어. 그렇다면 5월은 진짜 투쟁의 시작이야. 그 연장 위에서 우리의 투쟁목표는 분명해졌어.”

순분의 말대로 5월은 진짜 투쟁의 시작이었다. 소설 바깥에서 진행된 실제 역사에서, 80년대의 모든 운동은 그 해 5월에서 자양분을 얻었다. 그러나, 아니 차라리 그렇기 때문에, ‘깃발’의 리얼리즘은 허약해 보인다. 이 소설은 80년 5월에 대한 사실적 묘사라기보다 (소설이 발표된) 88년의 시각(한국 민주주의가 새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고,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는 아직 건재하던 때의 시각)이 짙게 투사된 낭만적 전망에 가깝다.

‘깃발’이 80년 5월의 언어가 아니라 88년의 언어라는 것은 작품 군데군데서 드러나는 ‘시대착오’에서도 확인된다. 소설은 도청 주변 담벽에 울긋불긋 붙어 있는 플래카드를 나열하며 “광주 꼼뮨 만세”라는 구호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또 형자가 5월 광주를 “해방구(解放區)이지만 고립된 해방구”라고 규정하는 장면도 보인다.

그러나 ‘꼼뮨’이라거나 ‘해방구’라는 말은, 비록 사회정치 운동의 역사에서 유래가 오랜 말이긴 하나, 남한 운동권에선 80년 5월 이후에야 쓰이기 시작한 것 아닌가 싶다. 자신의 문자 행위로 민중의 희망을 조직하겠다는 작가의 조바심이 이런 착오를 용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트집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깃발’은 화장기 없는 언어로 80년 5월의 한복판을 거칠게 질주하며 이 역사적 사건의 한 진실을 움켜쥐었다. 그 진실이란, 비록 5월 항쟁이 내건 목표가 소박한 시민민주주의의 확보였다 하더라도, 그 항쟁의 주체는 (지식인을 포함한 시민 일반이었다기보다) 프롤레타리아였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들이 “끝까지 책임지고 투쟁했고 역사를 만들어갔다.” 작가는 자전거로 출근하는 한 노동자의 형상에서 이들이 만들어갈 역사의 ‘깃발’을 본다. 그것을 묘사한 소설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뒤쪽에 도시락 가방이 꽁꽁 묶여 있었다. 그가 힘껏 페달을 밟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려갔다. 증기기관차의 김처럼 입김을 씩씩 뿜어내며 힘차게 달려갔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작업복 자락이 펄럭였다. 점점 멀어지면서 새벽 여명 속에 옷자락의 펄럭임만이 보였다. 수없는 펄럭임이었다. 그것은 깃발이었다.”

▲ '코뮌'에 대하여

1980년 5월항쟁 이후, 항쟁 당시 광주의 의사(擬似) 자치체계를 ‘광주 코뮌’(‘광주 꼼뮨’)이라고 부르는 일이 더러 있었다. 1871년 3월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수립돼 그 해 5월27일 무너진 파리 코뮌에 빗댄 것이다.

어원적으로 그저 ‘공동체’의 뜻을 지닌 프랑스어 코뮌(commune)은 중세엔 도시 공동체나 자유도시를 가리켰고 오늘날엔 우리의 시(市)나 군(郡)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행정 단위지만,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서 ‘민중 봉기로 제한적 지역에 수립된 혁명 정권’이라는 특별한 뜻을 덤으로 얻었다. 18세기 말 대혁명 당시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 용법은 1871년의 파리 코뮌을 거치며 깊이 뿌리내렸다.

1871년의 파리 코뮌은 역사상 첫 프롤레타리아 정권으로 꼽힌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져 나폴레옹3세의 제2제정이 무너지자 파리 노동자들은 일제히 봉기해 이 혁명 정권을 수립했다. 베르사유의 정부군이 파리로 진입해 노동자들과 시가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그 해 5월21일이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노동자 정권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계절의 상상력을 자극해, 광주의 5월을 파리 코뮌과 포개고 싶은 유혹을 더 키웠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 5월에 시민들이 무장한 것은 군부의 발포에 따른 반사적-수동적 대응이었고 항쟁 주체들에게 정권 수립 의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광주 항쟁을 코뮌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역사적으로 ‘광주 코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27년 중국공산당 광둥성(廣東省) 위원회의 지도로 봉기한 노동자와 농민들이 그 성도(省都) 광저우(廣州: 1980년 항쟁의 무대였던 광주시와는 한자가 다르고, 경기도 광주시와 한자가 같다)에 수립한 인민정권이 그것이다.

광저우 코뮌(또는 광둥 코뮌) 역시 파리 코뮌을 본떠 붙인 이름인데, 혁명 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의지가 개입된 민중봉기였다는 점에서 합당?명칭이라 할 수 있다. 그 해 12월11일 수립된 광저우코뮌은 군벌과 외세의 개입으로 7,000여 구의 주검을 남긴 채 사흘 만에 무너졌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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