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돈 밝히는 아이들/ (上) 직업선택 기준 4명 중 1명 "돈이죠"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돈 밝히는 아이들/ (上) 직업선택 기준 4명 중 1명 "돈이죠"

입력
2006.05.16 00:01
0 0

● 1. '남이 버린 물건을 탐하라. 얻어먹는 걸 부끄러워하지 마라. 공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라.' 서울 양천구 A초등 6학년 김모(12)군의 지갑 안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어린이 재테크 서적 '빈대가족의 가난 탈출기'에서 베낀 것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돈 내 놔!'. 친구들에게 100원을 빌려줘도 반드시 이자까지 받는다. 장래 희망은 은행원, 의사, 벤처사업가 등으로 수시로 바뀌지만, 그 기준은 항상 '돈을 많이 벌 수 있느냐' 여부다. 그는 "젊었을 때 빨리 돈을 번 다음 조기 은퇴해서 편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 2. 서울 도봉구 S초등 5학년 박모(11)군은 열흘마다 5,000원 씩 용돈을 받지만 늘 부족하다. PC방 게임비, 게임 사이버머니 등을 충당하려면 용돈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래서 박군은 지난 3월부터 동네에 있는 치킨가게, 태권도 도장 등의 전단지를 아파트 단지에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물론 엄마 아빠는 모른다. 수당은 100장 당 1,000원. 지금까지 2만원 가량 벌어 모두 사이버머니를 사는 데 썼다.

'돈 밝히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규모 있게 용돈 쓰는 법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는 정도로 '돈에 밝은' 게 아니다. 어른들도 깜짝깜짝 놀랄 만큼 '대박 심리'와 '금전 만능주의'가 팽배해 있으니 문제다. '돈'이 직업선택의 기준이 되고, '돈 많이 벌어 편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있다. 돈 버는 법을 미리 배우기 위해 주식투자를 하는 어린이, 돈을 벌기 위해 전단지를 돌리는 어린이들은 이제 새삼스러운 풍경이 아니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D초등학교 6학년생 348명과 성북구 종암동 S초등학교 6학년생 274명 등 총 622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장래 직업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기준'에 대해 전체의 25%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라고 답했다. '자신의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이라는 응답(53.8%)이 가장 높기는 했지만, 돈벌이에 따라 직업을 고른다는 응답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직업'(15%)이라는 답보다 월등히 높았다.

또 집 밖에서 전단지 돌리기, 빈병 팔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해본 초등학생이 13.7%나 됐다. 경찰 관계자는 "2~3년 전부터 돈벌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초등학생이 크게 늘었다"면서 "이 중 상당수는 학업장애와 탈선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물론,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에게 돈을 뜯기는 등 범죄피해까지 잇따르고 있다"고 우려했다.

성균관대 김경수(경제학) 교수는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어른들의 '돈 벌기 열풍'과 '대박 심리'가 아이들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며 "사회공동체에 대한 인식도 서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든 부자가 돼야 한다'는 천민적인 사회의식이 확산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 부유층 아이들은 용돈모아 주식투자 유행

#1. 경기 분당 A초등학교 5학년 미선(가명)이의 장래 희망은 ‘의사’이다. 미선이는 슈바이처와 같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봉사하는 삶’을 꿈꾸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아버지가 대학 교수로 남부럽지 않은 가정인데도, “엄마 아빠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돈을 많이 벌어서 ‘멋있게’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2. 서울 양천구 B초등학교 4학년 담임인 이모 교사는 지난해 말 아이들이 학급문집을 만들며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묻는 항목에 대해 ‘돈’을 ‘가족’이나 ‘친구’보다 먼저 꼽은 학생이 상당수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토론을 통해 정한 문집 제목도 ‘대박 터지는 우정 이야기’였다. 이 교사는 “우리 기성세대의 물신(物神)주의가 어린이들에게까지 ‘대박 심리’를 퍼뜨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대박 심리’와 과잉소비 분위기가 동심마저 물들이고 있다. 최근 유행하는 모의 주식투자와 어린이 펀드 등 조기 경제교육 프로그램 역시 합리적인 경제의식보다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를 키운다는 지적이다.

실제 팽창하는 소비사회의 틈바구니 속에서 어린이들은 휴대폰, 게임기, MP3 등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주식투자, 심지어 로또 등 도박까지 불사하는 게 현실이다. ‘돈에 밝은’ 아이를 키우려는 부모들의 바람은 온데 간데 없고 ‘돈을 밝히는’ 아이만 남은 셈이다.

서울 도봉구 C초등학교 6학년 형식(가명)이의 한달 용돈은 1만2,000원. PC방과 군것질, 휴대폰 비용(월 1만6,000원 중 4,000원)을 부담하려면 항상 빠듯하다.

더욱이 용돈을 아껴 한 달에 4,000원씩 저축하겠다고 부모님과 약속까지 했다. 형식이는 용돈이 부족할 때마다 집 주변의 치킨가게 전단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에 나선다. 그는 “부모 몰래 전단지 돌리기, 빈병 모으기 등으로 돈을 모아 PC방 비용이나 군것질로 쓰는 친구들이 여러 명 있다”고 말했다.

부유층 어린이들 사이에는 용돈을 모아 직접 주식투자에 나서는 게 유행이다. 서울 강남구 D초등학교 6학년 진성(가명)이는 자기 명의의 증권계좌를 만들어 6개월째 주식투자를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돈의 흐름을 알아야 논리적 사고를 키울 수 있고, 자립심도 길러줄 수 있다’는 어머니 김모(41) 씨의 판단 때문이다.

5만6,700원에 샀던 국민은행 주식은 지금 8만8,000원, 3만4,500원에 샀던 신한지주 주식은 5만원에 육박한다. 투자 원금 91만원이 현재 137만원(평가금액)으로 불어났다. 수익률이 무려 50%에 달한다. 진성이는 “어른이 돼서 편하게 살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 빨리 돈을 벌기에는 주식만한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기적으로 로또 복권을 구입하는 초등학생도 드물지 않다. 서울 마포구 E초등학교 6학년 기식(가명)이는 매주 집 앞 슈퍼마켓에서 로또를 한 장씩 산다.

법률상 19세 미만에겐 복권 판매가 금지돼 있지만, 부모님 심부름 핑계를 대면 별 탈 없이 살 수 있다. 친구들 5~6명이 모여 로또 복권뽑기 장난감으로 ‘돈 몰아주기’ 게임을 하기도 한다. 1명 당 1,000원씩 배팅하고 6개의 숫자를 찍은 다음, 장난감에서 나온 숫자를 가장 많이 맞힌 친구가 배팅한 돈을 모두 가져가는 방식이다.

기식이는 “1,000원은 금방 없어질 돈이기 때문에 차라리 한명에게 목돈을 만들어 주는 게 낫다”면서 “내가 돈을 딴 적이 있었는데 정말 ‘대박’ 맞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전용 인터넷포털 사이트에는 “쉽게 돈 버는 방법이 없나요?” “초등학교 5학년이 하루에 1,000원씩 벌 수 있는 방법 없나요?” 등 손쉬운 돈벌이 방법을 묻는 질문들이 수시로 올라온다.

어린이들에게까지 확산된 ‘한탕주의’는 패륜의식과 끔찍한 범죄를 낳기도 한다. 모 경제신문사가 최근 초등학생 대상으로 개최한 어린이 경제캠프에서 ‘부자인 할아버지에게서 컴퓨터 살 돈을 받아내는 방법’에 대해 6개 팀별로 아이디어를 내게 했다.

그런데 한 팀에서 ‘청부살인을 하면 할아버지 돈을 확보할 수 있다’는 답변과 함께 완전범죄를 위한 시나리오까지 제출해 캠프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더구나 이 답변은 참가 학생들의 토론 과정에서 ‘컴퓨터 살 돈을 받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달 초 전북 전주시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동급생을 흉기로 20여 차례 찔러 얼굴, 팔, 다리 등에 중상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담당 경찰은 “게임 아이템을 둘러싼 청소년 범죄를 많이 접했지만, 초등학생이 흉기를 마구 휘두른 경우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 학생은 게임 아이템을 팔기로 했던 동급생 친구가 맘을 바꿔 팔려고 하지 않자,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 교수는 “돈을 최고의 목표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천민자본주의가 어린 학생들까지 물들이고 있다”면서 “건전한 경제교육을 통해 기성 세대의 배금주의를 답습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 고재학(팀장)·유병률·안형영 기자, 사진부 = 최흥수·배우한 기자 news@hk.co.kr

■ "절제·포기 가르치는 '용돈교육'해야"

천규승(50)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교육실장은 “어린이 경제교육의 목적은 영악한 아이를 만드는데 있지 않다”면서 “돈과 시간, 능력의 제약 속에서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단순히 경제개념, 경제흐름만이 아니라 바람직한 소비습관이 들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 실장은 ‘경제는 습관이다’ ‘현명한 부모, 미래를 준비하는 자녀’ 등의 저술활동과 함께 교육부 경제교과서 발전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는 어린이 경제교육 전문가다. 다음은 천 실장과의 일문일답.

-어린이 경제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하나.

“물건을 고르는 방법뿐만 아니라 절제하고 포기하는 방법도 가르칠 수 있는 용돈 교육이 가장 기본이다. 갓난 아이 때부터 울기만 하면 젖을 물리는 습관을 들일 경우 절제를 모르듯이, 부모가 원하는 걸 모두 해주면 성취동기를 잃어 버리게 된다. 용돈을 아껴 자신이 원하는 걸 사는 재미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인 용돈 교육의 방법은.

“단순히 귀찮으니까 용돈을 준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사후 점검하는 과정에서 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 지를 깨닫게 해야 한다. 용돈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일주일 단위로 주는 게 좋다. 용돈의 소비 범위와 액수에 대해선 협의가 필요하다. 용돈 액수에는 생필품 비용뿐 아니라 놀이비용과 저축금액까지 포함시키는 게 좋다. 일단 줬으면 사사건건 간섭해서는 안 된다. 대신 한 달에 한번 내역을 점검해 ‘어떤 돈도 나중에 감사를 받는다’는 생각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초등학생의 주식투자나 경제캠프 참가는 바람직한가.

“어린이 주식교육을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주식을 사고파는 교육이 아니라 주식의 의미, 주가와 경제적 사건과의 연관관계 등 경제흐름을 가르치는 교육이 돼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설 학원 등에서 시초가, 상종가 등의 증권용어 해설이나 투자기법 등 엉뚱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벼룩시장 체험이나 경제캠프도 돈의 의미 등에 대한 사전교육 없이 단지 돈 버는 방법만 가르쳐주는 이벤트 형식으로 진행돼 아이들에게 헛된 망상만 심어주는 경우가 많다. 돈 쓰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창업놀이, 재벌놀이 등 돈 버는 방법부터 가르치는 것은 난센스다.”

-어린이 경제교육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게 좋나.

“아이들은 초등학교 4학년 정도가 돼야 경제교육의 맛을 보게 된다. 그 이전에 주식투자, 경제캠프 참가 등 각종 사교육을 시키면 학교교육에 흥미를 잃게 된다. 주식교육도 최소한 5학년 2학기 이후에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 경제교육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학교이다. 가정은 학교교육과 연계해 보조 역할을 하는데 머물러야 한다.”

기획취재팀 고재학(팀장)·유병률·안형영 기자, 사진부 = 최흥수·배우한 기자 new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