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자협회가 5월 20일을 '기자의 날'로 정했다. "신문의 날이 있는데, 또 기자의 날인가?"라는 물음이 신문사 안에서도 들렸다. 처음에는 나도 '웬 특권의식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기자협회는 '신문의 날'과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20일 기자협회가 군부독재와 언론검열에 반대하며 제작거부에 나섰던 날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잇기 위해 제정했다는 것이다. 협회는 전부터 동아ㆍ조선투위 등 선배들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을 기리기 위한 준비를 해 왔다고 한다.
'~~날'에는 해당 주제에 대한 관심과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다. 새 '기자의 날'도 언론인의 모습을 돌아보고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언론사에서 26년 전의 처절했던 '서울의 봄'을 체험했고 기억하는 현역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이 날을 계기 삼아 이제는 희미해진 개인적 기억에 의지해 역사적 삽화들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
● 26년전 신군부 맞서 제작거부
80년 5월 초의 일요일, 서울 마포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한국일보 팀과 어느 언론사 팀이 축구경기를 했다. 기자협회 회원사의 단결화합을 위한 친선 축구대회였다. 한 팀은 '계엄철폐'라는 머리 띠를 두르고, 다른 팀은 '검열철폐' 띠를 두르고 공을 쫓아 다녔다. 최루탄 냄새로 얼룩진 가운데 치러진 축구경기는 싱겁게 끝났다. 경기 끝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만나, 6~7명이 안암동 노향기 기자 집으로 갔다.
'한국일보 기자 일동'의 이름으로 계엄 장기화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만들러 간 것이다. 세 시간 정도 머리를 맞댄 후 작업을 끝냈다. 지금은 군사 장기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이룰 막중한 기회라는 것, 군은 시민과 학생의 민주화 외침을 외면하지 말고 국방으로 돌아가라는 것, 즉각 검열을 해제하고 계엄 또한 철폐하라는 것,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강도 높은 투쟁에 나설 것이라는 주장 등이 성명서에 담겨 있었다. 박재균 기자의 집에 모여서 만든 후, 두 번째 참여한 성명서 작업이었다.
순진한 행동이었다. 기자들은 평화적으로도 군부가 조장한 혼란과 집권야욕이 극복되고, 민주주의가 승리하리라는 기대에 젖어 있었다. 마침내 기자협회는 대의원회의를 통해 검열이 철폐되지 않으면 20일부터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이 또한 오산이었다.
군부는 17일 오히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인사와 대학교 학생 간부들을 체포했다. 협회 간부들도 차례로 잡혀갔다. 한국일보에서는 노향기 박정삼 기자가 구속되었다.
편집국은 즉각 철야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18일부터는 광주에서 학생ㆍ시민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27일 막을 내렸다. 정부 발표로는 191명의 사망자, 852명의 부상자가 났다. 약 2주에 걸친 기자들의 철야농성도 끝났다. 정권욕에 물든 탐욕스런 군부 앞에서 패배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패자가 감수해야 할 조건은 가혹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체제에 저항하는 기자들을 강제해직 시켰다. 가깝던 선배들이 대거 해직되었다. 지금도 내가 2년이 채 안된 초년기자였다는 점 외에 해직자 명단에서 빠진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굴욕감도 컸다. 그 뒤 3년 정도 몇 개월마다 형사가 집으로 찾아와 감시하다가 제풀에 그만두었다.
● 언론 내적 진실추구는 아직…
민주화한 지금, 기자들은 자유로운가? 정부로부터는 자유롭다. 언론은 정부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린다고도 생각된다. 그러나 '기자의 날' 제정 취지를 보면, 공정보도라는 언론의 내적 진실추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기자협회가 그 답을 동아ㆍ조선투위, 80년 해직기자에게서 찾고 있다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 회고한 이 글에, 혹 스스로를 미화하려는 불순한 욕망이 섞여 있지 않았을까 저어된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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