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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400년 이어온 中의 가톨릭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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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400년 이어온 中의 가톨릭 콤플렉스

입력
2006.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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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학자 레이 황은 오래 전 ‘1587년 동양, 아무 일도 없었던 해’라는 책을 썼다. 역사가 쓰여진 이래 생산력에서 서양을 몇 걸음 앞서왔던 중국이 서양에 뒤지기 시작했던 기점을 1587년으로 잡아 역사의 역전을 흥미롭게 기술한 저서이다.

1587년은 명(明) 말 만력제(萬曆帝) 통치기였다. 레이 황은 관료의 반대로 업적 하나 남기지 못했던 만력제, 개혁을 꿈꾸다 요절한 대학자 장거정(張居正) 등을 조명하면서 개혁과 진취적 기상이 사라진 이때를 중국 역사의 시계바늘이 멈췄던 시기로 규정했다.

●1587년, 中서양에 추월당해

하지만 이때에도 역사상 유학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좌파 양명학자 탁오(卓吾) 이지(李贄)와 중국에 가톨릭을 소개한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는 물밑에서 변화를 꿈꾸었다. 공자와 주희의 유학을 배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나는 한 마리 개였다”는 말로 반성했던 이지, 가톨릭과 서양 과학을 소개한 마테오 리치는 이 시기 유일한 진보의 싹이었다.

두 사람은 세 번 만났다고 한다. 이지는 “우리 말과 글, 예를 이해하는 그와 비견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데 왜 그가 먼 이곳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가장 자유롭고 폭 넓은 사상가인 이지마저 유일신을 세상 끝까지 전파하려는 서양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테오 리치를 단지 이방인으로만 대했던 것 같다.

400여년이 흐른 지금 중국에게 가톨릭은 여전히 이방인이다. 공산 정권 수립 이후 반세기 이상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중국과 바티칸은 수교를 모색 중이다. 하지만 최근 중국 정부가 지원하는 가톨릭애국회가 바티칸의 동의 없이 두 명의 중국 주교를 임명하자 양측간 수교 협상은 난기류에 빠졌다. 내정불간섭을 수교 전제로 내건 중국이 강수로 바티칸의 기를 꺾으려는 듯하다.

중국의 고민은 어느 정도 이해된다. 서양에 뒤지기 시작했던 때 가톨릭을 맞이한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치욕적으로 패배한 후 가톨릭 선교를 공식 허용해야만 했다. 가깝게는 20세기말 동구 사회주의 붕괴에서 가톨릭의 역할도 지켜봤기에 일사불란한 행정조직을 갖춘 가톨릭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회주의국가 중국의 태도는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종교자유 인정은 國格의 잣대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을 앞두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라는 외부의 요구에도 부응해야 할 상황이다. 그래서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양측간 수교는 머지않아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공산 중국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내정불간섭 원칙과 신앙의 자유를 어떻게 절충할 지는 미지수이다.

긴 관점에서 보면 21세기에 이뤄질 양측간 수교는 근대국가 중국의 완성으로도 볼 수 있다. 중국이 역사의 콤플렉스를 얼마만큼 극복하고 신앙의 자유를 어느 선까지 인정할 지는 중국의 국격(國格)은 물론 중국이 21세기 지도적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가를 재는 잣대가 될 것이다.

이영섭 베이징 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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