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다.
월드컵을 앞두고 빨간옷은 국민들의 구매 목록 1순위에 올랐다. 5ㆍ31 지방선거 후보자들은 너도나도 빨간 넥타이를 매고 “더 젊게 더 튀게”를 외치며 거리와 TV를 누비고 있다. 빨간색을 전면에 앞세워 소비자를 유혹하는 레드 마게팅(Red Marketing)도 한창이다. 붉은 색 열풍의 중심에는 월드컵이 있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사는 박철민(35)씨 가족은 붉은 악마로 변신할 채비를 마쳤다. 최근 동대문 의류 상가에서 자신과 아내와 아들(5), 20개월 된 딸이 6월 월드컵 한달 동안 입을 붉은 티셔츠 여덟 벌과 빨간 두건을 샀다. 그는 “독일과 시차가 있어 아이들이 잠 자는 한밤이나 새벽에 한국 경기가 열려 아쉽지만 빨간 옷 입고 열심히 한국팀을 응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의류 업계에 따르면 붉은 악마 티셔츠는 4월부터 판매가 급증했다. 붉은 악마 공식 응원복을 생산 판매하는 베이직하우스의 서울 지역 매장 관계자는 “각 매장에서 하루에 팔리는 붉은 악마 티셔츠는 평일 40장, 주말 80장 정도”라며 “첫 출시된 1월 이후 두 달 동안 하루 10장도 안 나갔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라고 말했다. 인터넷 쇼핑몰 관계자는 월드컵이 개막되면 지금의 두 배는 너끈히 팔릴 것으로 기대했다.
정치판에서 빨간색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기의 대상이었다. 북한을 상징하는 색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친북 좌파로 낙인 찍혀 색깔론 공방에 휘말린 정치인은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지금 빨간색은 정치 무대에서 호사를 누리고 있다. 빨간색 없이는 선거를 못치를 정도다. 유권자들의 눈에 잘 띌 뿐만 아니라 젊고 정열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젊은 후보는 역동성을 강조하고, 나이 든 후보는 노회한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 빨간색 만큼 좋은 게 없다. 점점 고조되고 있는 월드컵 분위기의 영향도 크다.
선거 전문가들은 “이번 지방선거 대략 후보자의 절반 이상은 빨간색 넥타이를 맨 채 명함과 포스터 사진을 찍었고 유권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모 후보는 빨간색을 자신의 이미지 색깔로 택했다. 올 초 모 정당의 의장 경선 유세장에서는 남자 후보 전원이 빨간 넥타이를 매고 연단에 서는 진풍경도 빚어졌다.
50대 중반으로 서울 영등포구 구의원 후보자로 나선 A씨는 이번 선거를 위해 빨간색 계통의 넥타이 5개를 새로 마련했다. 그는 “아무래도 짧은 기간에 유권자들 눈에 들려면 튀는 색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평소에 안 매던 색깔이라 처음엔 어색했지만 갈수록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웃었다.
모 정당의 선거 기획본부에서 후보자의 이미지컨설팅을 돕고 있는 김수경씨는 “빨간색이 역동적인 이미지를 줘 특히 나이 드신 후보자들에게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레드 마케팅’은 5월을 더 붉게 물들이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달부터 프라이데이 인 레드(Friday in red) 이벤트를 실시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에 전 직원들이 붉은 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고객을 맞이하는 것이다. ‘빨간 주유소’로 이미지를 굳힌 SK㈜는 전국 4,300개 주유소 및 충전소에서 다음달 30일까지 월드컵 응원가와 750만개에 달하는 붉은 응원 리본을 나눠준다.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구관에는 월드컵 대표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빨간색을 바탕에 깐 초대형 태극기 현수막(가로 94m 세로 23m)이 걸렸다.
빨간색 오렌지 주스가 나왔는가 하면, 영화 ‘왕의 남자’의 배우 이준기가 광고해 히트상품이 된 음료도 빨간색 주스다. 흰색이나 회색 계통의 제품들이 주인 행세하던 백화점 가전제품 코너 앞줄은 와인색 등 붉은 계통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 상당수 인터넷 쇼핑몰 업체들도 홈페이지를 빨간 색으로 단장하는 등 ‘레드 특수’를 겨냥하고 있다.
최근 한정식 집을 찾은 회사원 정모씨는 “레드 와인을 시켰더니 붉은 월드컵 티셔츠도 함께 주더라”며 “레드 마케팅과 월드컵 열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빨간색 전성시대다.
김일환기자 kev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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