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근대 전쟁 보다 막대한 희생을 낳았던 문화대혁명 40주년을 맞는 중국은 예년처럼 조용하다. 40주년을 하루 앞둔 15일 중국 언론들은 문화대혁명을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문혁은 상하이(上海) 언론인이었던 야오원위안(姚文元)이 베이징 부시장 우한이 쓴 경극 대본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자본가계급 소탕을 결정한 1966년 5월 16일 공산당 정치국 회의의 통지로 시작됐다.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한 1976년 9월 9일까지 10년간 300만명 이상이 숙청되고 100만명 이상이 사망하는 동란이 지속됐다.
홍위병의 등장, 군부의 권력 장악, 장칭(江靑) 등 4인방의 권력 농단 등으로 점철된 문혁은 50년대 대약진 운동으로 실권한 마오가 대중운동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지만 전통문화와 지식기반, 권위의 파괴로 이어져 중국을 크게 후퇴시키고 말았다.
문혁이 끝난 지 30년, 한 세대가 지나도 중국 정부는 문혁의 평가를 유보해두고 있다. 잊혀지기 만을 바라고 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마오의 공은 7할이고 과는 3할”이라는 덩샤오핑(鄧小平)의 평가, “문혁은 마오의 좌파적 영도에 따른 잘못이지만 이를 이용한 기회주의자들이 큰 손실을 가져왔다”는 공산당 공식 평가는 철저한 재조명을 차단하는 지침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는 문혁 평가를 통해 국부인 마오를 비판할 경우 공산당 독재의 기초가 흔들리는 것은 물론 6ㆍ4 톈안먼(天安門)사건 등 현대사의 비극들이 새롭게 조명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문혁의 재평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지난해 사망한 문호 바진(巴金)은 생전에 문혁의 재평가를 줄기차게 요구했으며, 올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도 반성을 위한 문혁 박물관 건립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장쩌민(江澤民) 집권 당시보다 좌파적 색채가 짙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재임기에는 재평가 작업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중국의 최대 포털 바이두(白度)에 문화대혁명을 입력하면 ‘이 단어를 입력하면 관련 법령을 위배할 수 있다’는 문구가 뜬다. 문혁 종료 후 개혁파들은 백화제방을 노래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베이징=이영섭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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