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 빛은 한창 푸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이 반쯤 피었고 녹음은 푸른 일산에 은은히 비치는구려. 이즈음 마침 동동주를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동이에 넘실대니, 즉시 오셔서 맛보시기 바라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벌써 쓸어놓고 기다리오.”
풍운아 허균(1569~1618)이 권필(1569~1612)에게 내방을 권한 간찰이다. 당시의 언어가 지금과 꽤 달랐으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표현 하나하나에서 친구를 향한 절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권필은 누나가 있던 강화도에 살다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한양으로 들어왔는데 허균과 꽤 가깝게 지냈다. 허균은 간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강화에 계실 적에는 한 해 두어 차례 서울에 오실 때마다 저의 집에 줄곧 머무르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니 인간 세상에서 정말 즐거웠던 일이었다오. 그런데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오신 뒤로는 열흘도 한가롭게 어울린 적이 없어 강도(강화도)에 계시던 때보다도 못하니,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우리 선조들이 멀리 떨어진 가족 혹은 친구와 안부를 주고 받을 때 사용한 편지에는 이처럼 그윽한 마음과 정이 들어있었다. 이런 편지를 옛날에는 흔히 ‘간찰’(簡札)이라고 불렀는데 학문이 깊은 선조들은 거의 매일 간찰을 썼다. 때로는 시처럼 경쾌하면서 때로는 심각하고 깊은 장문의 형태를 보였다.
‘간찰-선비의 마음을 읽다’는 이규보 이제현 정몽주 김시습 이황 이이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황현 등 24명의 간찰을 모은 것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가 이들이 남긴 간찰의 내용을 소개하고 의미와 당시의 시대상을 덧붙였다.
간찰의 내용은 참 다양하다. 안부를 묻고 친구를 그리워하며 시국을 우려한다. 양양 설악산에 은둔하던 김시습(1435~1493)은, 환속과 벼슬살이를 권한 양양부사 유자한(?~1504)의 청을 이렇게 거절했다. “저는 외곬이라서 아무리 궁해도 구걸을 못합니다. 남이 주는 것도 받지 않고, 받더라도 어깨를 움츠리고 무릎으로 설설 기지 않습니다…이것이 나쁜 습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이(1536~1584)가 송익필(1534~1599)에게 현실 참여의 의지를 밝힌 것 역시 간찰을 통해서였다. “지금은 억만 백성이 물 새는 배에 타고 있으므로 그것을 구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무사 백동수(1743~1816)에게 복잡한 현실 세계를 떠나 안분지족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더러는 잠시 한가한 시간을 내어 대숲에서 나는 바람 소리를 듣고 배꽃에 흐르는 비를 맞으며 그림자하고 즐긴다오. 그 누가 이런 흥을 알겠습니까!”
구한말의 지사 황현(1855~1910)이 친구 이건방(1861~1939)에게 보낸 간찰에는 민족의 위기를 걱정하는 처절함이 들어있다. “세계가 날로 아지랑이 속에 빠진 듯 혼미해 가니, 때때로 아주 잠들어버려 잠꼬대조차 하지 않았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온 세상이 귀먹고 눈멀어서 마치 혼돈의 개벽 상태에 있는 듯 합니다. 가슴을 치고 미친 듯 울부짖을 따름입니다.”
옛 사람의 간찰에는 교제의 미학이 담겨 있었다.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관계를 맺기 위해 모색하는 긴장도 들어있다. 이메일, 문자메시지 같은 현대식 통신수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간찰만의 멋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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