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호 시인의 첫 시집 ‘달 안을 걷다’(천년의시작 6,000원)는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는 배를 지키고 선 늙은 아비의 단단한 고독과, 난류(亂流)를 가로지르며 편안한 물길로 나아가려는 형형한 응시로 빛난다. 그 여정의 내력과 풍경이 이 시집의 뼈대인데, 시인은 그 거친 육질의 뼈대를 시인 자신의 인상처럼 부드러운 서정의 피부로 공들여 감싸고 있다.
‘연날리기’라는 시에서 연을 날리는 어린 ‘나’는 해 저물어 볼 붉어진 아이들이 연줄을 끊고 제 집으로 스미는데도 얼레를 놓지 않는다. “주먹만한 숨구멍 하나로 바람에 맞서는 내력은/ 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일한 유산//(…)//시누대숲의 갈피에서 불어온 바람에/ 연 대신 내 몸을 부풀린다/ 바람에 몸을 묶는다”
1부의 시들은 연의 내력을 어린 나의 운명에 포개놓고 떠난 ‘아버지’에 대한 어두운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젊은 아버지는 얼굴을 몰라/ 꿈에도 오지 못하”고 간신이 내 몸을 빌려 허공의 연기처럼 얼비치다가도 “주문처럼 지워”지는 존재다. 시의 주체들이 “입 진 나무처럼 뒷모습이 전부인 그를/ 물결 한복판으로 밀어내고 싶”(‘귀가’)다가도, 고통스럽게, 그리고 집요하게, “뿌리쪽으로 가지를 구부려”(‘서천으로’) ‘아버지’의 그림자를 더듬는 까닭은, 그 ‘아버지’가 문신처럼 내 몸에 새겨진 바람의 무늬, “미처 내가 살지 못한 전생(前生)”(‘청맹과니 마술사’)이기 때문이다.
“밤새 판 어둠의 자리에 아이들은 아버지를 묻”고 “그리고 벼랑을 쌓”아도, 그래서 ‘뿌리 없는 꽃들이 환하다’고 자위해도, “생(生)은 몇 번씩 몸을 바꿔/ 별이었다가 꽃이었다가 닻이었다가/ 유곽이었다가 성당이었다가/ 어제처럼 늙은 내 아이가 되”(‘강가의 묘석)’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란 “문득 시들어버린 내가/ 잎 진 나무로 강가에 몸을 잠그면/ 가지 끝에 옮아 피는 앙상한 길”처럼 “한 물결로 펄럭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고단한 내력의 삶을 버텨 ‘나’도 아버지가 된다. 가지 끝에 옮아 핀 앙상한 길처럼, 주먹만한 숨구멍 하나로 바람에 맞서야 할 내력을 타고난 이 아이의 ‘난생처음 봄’(전재)을 바라보는 아비(‘나’)의 노래는 시리도록 투명하고 아릿하게 아름답다.
시인은 2003년 신춘문예 등단작인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에서 할아버지의 죽음과 어린 소의 탄생의 풍경을 잘 닦은 ‘오래된 청동거울’처럼 깊고 서늘한 서정으로 담아낸 바 있다. “…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삼칠일도 안 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시인이 ‘아버지’를 통해 상징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것이 낡은 것으로 치부해버리기 쉬운 오래된 권위나 가치이든, 어디서도 행세하기 힘든 이 세태 안의 ‘시인’이든, 아니면 ‘뿌리 없는 꽃’처럼 화려하게 개화하고 있는 요즈음의 젊은 시든, 또 다른 무엇이든 독자들이 고를 일이다. 그리고, 상징의 복잡한 층위를 버리고 그냥 ‘나의 아버지’여도 좋을 것이다.
▲ 난생처음 봄
풀 먹인 홑청 같은 봄날
베란다 볕 고른 편에
아이의 신발을 말리면
새로 돋은 연두빛 햇살들
자박자박 걸어 들어와
송사리떼처럼 출렁거린다
간지러웠을까
통유리 이편에서 꽃잠을 자던 아이가
기지개를 켜자
내 엄지발가락 하나가 채 들어갈까 말까한
아이의 보행기 신발에
봄물이 진다
한때 내 죄가 저리 가벼운 때가 있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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