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주근깨투성이, 짝짝이 양말에 기괴한 신발을 신고 ‘뒤죽박죽 별장’에 혼자 사는 9살 소녀 ‘삐삐 롱스타킹’. 1945년, 린드그렌의 동화 속 ‘삐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어른들은 ‘신경을 건드리는 불쾌한 아이’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학교를 다니지도 않고, 툭 하면 허풍에 거짓말이고, 어른들의 상식과 질서에 사사건건 맞서는 아이였으니 말 그대로 ‘구제 불능’이었을 것이다.
삐삐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어른들은 수십 년이 걸렸지만 아이들은 한눈에 열광했다. 현대 사상계의 거물이자 일본 문화청 장관인 가와이 하야오씨는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의 ‘상식’은 창조적인 아이들을 몹시도 괴롭히고 상처를 입히지만, 삐삐는 여기에 의연히 맞서며 오히려 어른들을 가지고 놀”(159쪽)았다고, “어른들은 ‘선’의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악을 행하는 재주가 뛰어나다”(253쪽)고.
어른들이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아니 그렇게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성의만으로도, 이 세상은 한결 살 만해지지 않을까. 과연 아이들의 마음은 동요가 가르치듯, 하늘처럼 파랗고 눈처럼 하얗기만 하고, 어린 시절은 엉터리 작가들의 글에서처럼 “최상급 케이크 반죽으로만 구워지는” 것일까.
하야오씨의 두 책은 이 쉬운 듯 어려운 ‘앨리스’들의 영혼 세계를 안내하는 책이다. 융(Jung) 심리학계의 세계적인 권위자답게 그는 명작 동화들 속 주인공들의 마음을 분석해 그들의 ‘앨리스 맵’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풍성하고 자상하게 제공한다.
가령 그는 에리히 캐스트너의 동화 ‘하늘을 나는 교실’의 사춘기 말썽쟁이들의 이야기에서 아이들의 세계에 필요한 폭력과 권위의 의미를 부각한다. 동화에서 아이(고1쯤의 청소년)들은 한 반 친구가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공책을 빼앗기자 의리의 패싸움을 벌인다. 내막을 뒤늦게 알게 된 사감 선생님은 그들을 불러 엄한 표정으로 벌을 내리는데, 그 벌의 내용이 ‘방학 첫 외출 금지, 대신 나와의 커피 타임’이다.
하야오씨는 “폭력을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와 같은 단순한 이분법으로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일면적인 명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너무나 나약한 인간이다. 우리는 모순되는 양극 사이에서 참고 견디며 옳은 길을 개척하는 강인함을 지녀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권위를 이야기한다. “사춘기의 폭풍우와 맞서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위가 필요하다”(45쪽)고, 그 권위는 교사가 ‘학생들과 동등하다거나 친구라고 주장’하는 얼치기 권위가 아니라 “학생들과 결코 동등해질 수 없는 고독감을 맛보아야 한다”고.
두 권의 책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25편이다. 이를 통해 그는 어른들이 부여하는 최상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느낄 수 밖에 없는 소외와 고독감, 스스로를 유일한 존재로 인식시키며 자의식을 완성하게 해주는 ‘비밀’의 소중함, 아이들의 분노나 화풀이 심술 등 나쁜 감정들이 많은 경우 좋은 감정의 표면적 형태라는 사실, 공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판타지의 의미, 그들의 이성관, 질병, 꿈과 이상 등과 관련한 내밀한 영혼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이들의 행위와 내면이 지닌 다층성, 즉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어린이들의 내면에서 무시무시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107쪽)을, 그 전투가 “각각의 나이에 따라 삶을 헤쳐나가기 위해 치르는 엄청난 전쟁”(206쪽)임을 이해하게 해준다.
삐삐와 친구들은 동화의 끄트머리에 가서 어른이 되지 않게 해주는 약을 나눠 먹는다. “어른이 되는 건 시시해. 늘 재미없는 일만 하고, 바보 같은 옷을 입고, 티눈만 생기고, 지방자치세도 내야 하잖아.” ‘삐삐’의 멋진 ‘뒤죽박죽 별장’에 초대 받고싶다면 이 책을, 그리고 이 책이 소개한 책들을 찾아 읽는 게 우선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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