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곱다.
매화와 진달래 향이 사그러들고, 봄하늘을 휘황하게 밝혔던 벚꽃 사과꽃 배꽃마저 져버린 지금, 꽃봄의 축제가 끝난 허망함을 신록이 대신해 달래고 있다. 마냥 한가지인 초록의 색조가 따분할 법도 할 텐데 그 연둣빛 어린잎들, 영락없이 갓난 아기의 조막손 같은 연한 잎들이 빚은 아름다움은 꽃사태 이상이다.
먼 발치에서 숲을 바라보면 연두 담황 담록 담적 등의 색깔이 파스텔톤으로 서로의 경계를 엉켜가며 저마다 색을 뿜어대는데 소박하다고만 느꼈던 초록의 빛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 없다.
연둣빛 신록을 몸으로 흠뻑 느끼는 여행이 있으니 바로 차밭기행이다. 오월의 햇볕이 점차 무르익으면서 남도의 차밭은 지금 햇차를 따는 손길로 무척이나 분주해졌다.
깨끗한 하늘 아래 깨끗한 땅에서 맑은 차가 자란다고 한다. 그 깨끗하고 맑은 땅 중에 하나가 전남 보성이다. 이곳의 180여만 평 되는 차밭에서 전국 차 생산량의 45%가 나온다. 주민들도 이젠 벼가 아닌 차로 먹고 사는, 차의 고장이다. 보성은 지금 차밭으로, 신록의 숲으로, 청보리밭으로 온통 푸름이 출렁이는 초록의 세상이다.
장흥으로 해서 일림산 밑을 돌아 보성으로 넘어오는 길. 차창 밖 들녘은 자운영으로 붉게 물들었고, 청보리밭의 청청함이 넘실거렸다. 보리밭에 바람이라도 불면 마치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가듯 보리 이삭을 타고 바람의 자취가 지나간다.
소리꾼이 넘나들었다는 고개 봇재를 오르기 시작하자 드디어 초록 융단의 물결이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급경사의 산능선을 타고 차밭의 선들이 이리 돌고 또 저리 돌고. 그 굽이가 장단을 탄 듯, 진양조로 길게 늘어지다가 중중모리로 제법 빨라진다 싶더니 휘모리로 급하게 휘돌아 나가는데, 선의 물결은 그 자체로 서편제의 소리를 연주하고 있다.
봇재 정상 못 미쳐 콘크리트로 지어진 허름한 정자인 다향각이 봇재차밭 전경을 가장 잘 구경할 수 있는 포인트다. 멀리 영천제 저수지까지 들어오며 차밭이 그려놓은 셀 수 없이 많은 선들을 풍경에 담아내는 곳이다. 초록의 능선마다 챙모자를 쓰고 그 챙 위로 또 수건으로 감싸 얼굴을 칭칭 가린 아낙들이 초록의 새순들을 뜯어내고 있다. 신록의 봄을 따내고 있는 중이다.
보성의 차밭들은 대부분 봇재 주변에 몰려있다. 봇재의 안개 때문이다. 청정해역 득량만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바다안개가 보성녹차를 키워온 것. 한반도의 부족한 강우량을 연간 150일 넘게 짙게 드리우는 안개가 대신 충족시켜준다고 한다.
봇재를 넘는 18번 국도변에 늘어선 다원들 중에는 대한다업이 가장 유명하다. 1959년에 문을 열었으니 50년이 가까워졌다. 수많은 영화 드라마 광고의 촬영장소였기에 친근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해뜰 무렵 찾으면 입장료(1,600원)를 안내고 홀가분하게 안개에 젖은 차밭을 거닐 수 있다. 봇재 정상의 봇재다원과 보성읍 방향의 몽중산 다원 등도 차밭의 향에 빠져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각 다원은 올해의 햇차를 음미할 수 있는 시음장을 갖추고 있다.
보성=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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