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 친숙해져야" 젖먹이를 영어노래학원 보내
유아 사교육의 연령이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6~7세를 대상으로 한 영어유치원이나 학습지, 각종 학원이 일반적인 현상이 된 데 이어 최근에는 3~4세까지 파고들고 있다.
서울 송파구의 한 영어음악학원의 모집대상은 생후 5개월부터다. 영아에게 영어노래를 들려주면 영어가 친숙해져 나중에 더 잘 배울 것이라는 부모들의 기대심리를 자극해 원생들을 모집하고 있다. 경기 군포시의 한 영어학원은 생후 18개월부터 그림책과 카드 등을 이용해 부모와 함께 영어를 배우도록 한다. 경기 성남시의 한 수학학원의 수강대상이 24개월부터다. 다양한 교구를 써서 수, 도형, 공간 등의 개념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만 1~3세 영유아를 위한 초(超) 조기교육으로는 단어카드(플래시카드)를 이용한 한글교육이 수년 전 붐을 이루다 최근 몇 년간 ‘창의성 개발’을 내건 은물, 가베, 프뢰벨 등 놀이 교구가 인기를 누려왔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영유아 학원은 놀이와 문자ㆍ수 학습을 결합시킨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입시를 정점으로 한 선행학습이 갈수록 조기화하는 연쇄작용의 결과다. 7세 딸에게 독서교실과 한자 그룹과외를 시키는 주부 김모(40ㆍ경기 고양시) 씨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학년이 올라가면 가르쳐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에 글짓기 같은 것은 미리 해둬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나라는 5세(만 3~4세)면 유치원에 들어가 한글과 영어, 수 등을 배우고 피아노, 미술 등 특기교육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인 6~7세가 되면 따로 그룹과외나 학원을 통해 독서교실, 한자 등을 시작한다. 논술에 대비한 조기 교육이다. 철학, 마인드맵, 동화구연 학습도 7~8세면 이뤄진다. 구술면접을 겨냥한 것이다.
외고, 과학고 등 특수목적고를 가려면 중 1년부터 사설학원의 ‘특목고반’에 들어가 준비해야 하고, 이를 위해 초등 고학년부터는 교내 경시대회나 과외과목을 선별적으로 ‘조직’해야 하기 때문에 “대학 진학은 초등 4년 때 결정된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돌고 있다. 연쇄적인 선행학습과 학부모의 조급증이 결과적으로 만 1~3세 유아교육까지 낳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조기교육이 청소년기 학업성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이기숙 교수는 “유아기에 문자(한글)와 수를 조기 학습한 아이들과 학습하지 않은 아이들을 추적 관찰해 초등 5년과 중 1년 때 모의고사를 실시한 결과 국어 수학 성적은 큰 차이가 없고, 사회성은 조기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더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동덕여대 우남희 교수가 조사한 만 4세, 7세 어린이의 영어교육 실험연구에서도 학습효과나 발음 면에서 7세 아동이 월등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우 교수는 “노래나 게임 등 놀이중심으로 가르쳐도 4세 아동은 놀이로만 받아들일 뿐 영어학습효과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대목동병원 소아정신과 김의정 교수는 “학습문제로 병원을 찾는 신규 환자가 한 달에 10~15명이며 대부분 틀에 박힌 교육에 처음 노출된 만 2~3세 아이들”이라며 조기교육의 부작용을 지적했다. 그는 “엄마의 의지에 따라 어려서부터 학원교육을 받았다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공부에 싫증을 느껴 병원을 찾는 아이의 경우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김희원 기자 hee@hk.co.kr
■ "시켜도 걱정, 안시켜도 걱정이에요"
서울에 사는 5세 남아 현철(가명)이는 원형탈모증으로 대학병원의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눈썹을 뽑는 버릇으로 눈썹은 반이 없어졌다. 현철이는 유치원이 끝난 뒤 영어, 수학, 미술, 피아노, 태권도 등 7과목의 학원을 거쳐 땅거미가 져서야 집에 온다. 현철이는 상담 중 의사에게 “영어학원 가기 싫다. 시험을 너무 많이 쳐서 짜증 난다. 엄마 좀 말려 달라”고 말했다.
대학원까지 나온 현철이 엄마는 “특별히 많이 시키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잘 따라간다”며 오히려 화를 내고 나가 다시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놀려서 키우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세훈(가명)이 엄마는 세훈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한글을 깨치지 못한 채 학교에 입학한 세훈이가 친구들이 글을 척척 읽고 쓰는 것을 보면서 심하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세훈이는 “엄마, 나는 왜 공부를 못해”라고 하소연하기 시작했고, 엄마는 자신의 소신이 아이를 버려놓은 것이 아닌지 크게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너무 시켜도 탈이지만 안 시킬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교육을 완전히 도외시하다간 아이가 자신감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남들은 다 하는데”라는 불안감을 이기기 어렵다.
최근 초등 1년 아들을 교내 동화구연대회에 내보냈던 직장여성 정모(37)씨는 “집에서 읽은 동화를 이야기한 것은 우리 아들뿐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출전아들은 회당 10만~15만원씩 하는 교습을 받고 교사가 써준 창작동화를 연습해 발표했다는 것.
정씨는 “구연동화까지 과외 받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배운 아이들이 확실히 발표력이 좋고 칭찬스티커를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라며 초조감을 드러냈다.
경기 고양시 박모(39)씨는 초등 6년까지 주위 수준에 맞춰 학원에 보내다 지친 아들을 보다못해 최근 학원을 모두 끊어버렸다. 그는 “공부 자체를 싫어하게 만드느니 집에서 2시간씩만 시키기로 마음먹었다”면서도 “하지만 아이 자신이 친구들에 대해 다니는 학원에 따라 등수를 매기고, 그 친구들과 비교해 자신 없어 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고주희 기자 owell@hk.co.kr
■ 전문가들은 어떻게 자식 가르쳤나
“일찍 가르친다고 나중에 공부 잘하는 것은 아니다.” 육아교육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교육이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자신의 아이를 어떻게 키웠는지 들어보자.
육아정책개발센터 나정 정책연구팀장은 큰 딸이 초등 5년이 되어서야 영어학원에 보냈다. 나 팀장은 아이를 유치원이나 학원에 보내는 대신 이웃 주부들과 ‘품앗이 교육’을 했다. 즉 엄마들이 책읽기, 그리기, 나들이 등 담당을 나눠맡고 가을, 물, 꽃과 같은 주제를 잡아 관찰-토론-표현하도록 하는 식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때 다소 처졌던 아이들은 모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나 팀장은 “한국의 사교육이 분명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나 학교성적을 목표로 어른이 주도하는 교육은 문제가 많다”고 단언했다. 그는 “유아에게 최고의 교재는 자연물이며, 학습은 유아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이기숙 교수는 “노래를 통해 영어 단어 몇 개 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 직후 시험에서 ‘5-3=5’라고 답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셈하기를 전혀 배우지 않은 아들이 교사에게 “이게 무슨 문제냐”고 묻자 교사는 “앞에서 뒤에 것을 빼라”고 답했고, 아들은 곧이곧대로 뒤의 숫자 3을 빼고 5만 답했다는 것.
이 교수는 “아들에게 사탕 5개에서 3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고 설명하자 곧 이해했다”며 “유아들은 상징과 구체물의 관계를 이해할 때 언어능력과 지능이 발달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책만 가득한 환경보다, 헝겊 인형 나무토막과 같은 구체물과 섞여있는 환경이 언어능력 개발에 효과적이다.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도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지 않은 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는 “아이가 학교에 가서 모르는 것을 배우니 신기해 하면서 재미를 붙였다”며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은 유치원 정도만 보내고, 텔레비전 컴퓨터 등을 치워버리는 게 오히려 놀이와 친구를 찾게 만든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간혹 문제행동을 일으켜 병원을 찾는 아이들의 경우도 다 아는 것을 배우는 수업시간보다 친구를 때리는 일이 더 재미있기 때문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에 나오는 마시멜로 실험은 다중지능이론의 개념을 시사한다. 미국 스탠포드대 월터 미셸 교수가 유아들에게 마시멜로 과자를 주며 15분간 참으면 1개를 더 준다고 했을 때 3분의 1은 그냥 먹어버렸고, 3분의 2는 상을 받았다.
더 놀라운 것은 기다린 아이들이 14년 뒤 미 수학능력시험(SAT)에서 훨씬 높은 성적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글읽기와 셈하기 능력만이 아니라 통제력과 사회성, 예술성 등이 모두 종합적으로 지능을 구성한다는 뜻이다. 어떤 교재를 몇 살에 가르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흥미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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