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해도 피로가 밀려오는 내 책상. 수첩과 공책이 군데군데 크고 작은 바위섬처럼 솟아 있고 그 사이사이, 메모를 갈겨 써 놓은 신문지, 광고전단, 편지봉투, A4용지들이 어지럽게 물결친다.
이래서야 기껏 메모한 걸 써먹으려 해도, 바닷가에 쓸려온 물건에 살뜰히 기대어 사는 로빈슨 크루소처럼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때로 뜻밖의 즐거움을 주는 메모가 손에 잡히기도 하지만, 짜증에 겨워 난파자의 비탄에 젖기도 한다.
메모들을 모아 공책에 정리해 옮겨놓자고 진작 생각했지만, 실행의 날은 오지 않고 메모 쪼가리가 나날이 더해진다. 이런 것도 있네. 자색 하늘 아래 코브라 같은 몸통을 뒤틀며, 폭풍에 부푼 이파리를 플레어스커트처럼 펼친 두 그루 야자수. 주먹만한 조가비에 새겨진 그림이다.
그런데 이게 조개가 맞을까? 두껍고 단단하고 매끈한 하나의 껍질이 좁은 틈을 남기고 오므라져 있다. 그 틈에 귀를 대면 멀리서부터 회오리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가득 든 조가비 혹은 소라껍질. 이 바람소리를 좋아했던 내 어린 친구가, 저도 하나밖에 없는 걸 내게 줬다. 잠시 만사를 잊고 바람소리를 듣는다. 해변을 거니는 크루소처럼.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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