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북 압박 정책이 가시화하고 있다. 북핵 협상을 위한 6자회담이 공전하고 있는 가운데 대북 금융제재에 이어 인권 압박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지난달에는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전 인민군 장교 출신 탈북자 서재석씨의 이민을 허용하더니, 이 달 들어 북한인권법 제정 이후 처음으로 탈북자 6명의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서씨의 경우 LA 이민법원의 독자적 판단에 의해 이민을 허용했다고 하니 기술적인 사안이라고 쳐도, 탈북자 6명을 받아들인 것은 심상치않은 움직임이다. 이제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협상 상대의 자존심을 훼손시키면서 협상이 잘 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의도는 뭘까.
6자회담에 대한 기대를 상당부분 접은 것이 아닌가 싶다. 북핵 협상은 중국이 갖고 있는 대북 영향력을 통해 개최되도록 압력을 넣되 미국은 한 발 뺀 상태에서 북한 정권이 ‘폭정의 전초기지’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널리 홍보(?)하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은 북한을 고립시키는데 매우 좋은 호재이다. 탈북자들은 이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에 미국이 탈북자들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의 대북 인권 압박이 북한 정권의 존망을 좌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만일 미국이 그런 기대를 하고 있다면 북한 정권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북핵 협상을 조기에 매듭짓고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는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더 현명하고, 빠른 길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 북한이라는 나라와 바로 그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그다지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에게 북한은 ‘말도 안되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작고 무모한 나라쯤으로 비친다. 처음에는 뭔가 대단한 카드가 있는 것처럼 인식했지만 협상을 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물론 미국에게 다뤄야 할 나라들은 북한 말고도 많이 있다. 최근에는 이란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미국의 관심은 중동으로 다시 쏠리게 됐다. 사정이 이러니 북한 문제는 시간을 벌면서, 북한이 양보하고 들어오면 협상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는 쪽으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이런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면 한국 정부의 입장은 더욱 어려워진다.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 장단을 맞출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미국과 엇박자를 내면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옹호한다는 비판과 함께 한미 공조의 기반은 더욱 좁아진다. 지금이야말로 한국 정부가 현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며,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할 때다.
이렇게 어긋나는 식으로 한미관계를 끌고 가는 것은 한국의 외교안보적 이익에 도움이 안 될 뿐더러 북한에 대해서도 레버리지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인권 문제를 한국이 거론한다고 해서 남북관계가 냉각될 거라고 본다면 그것도 순진한 발상이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이 북한 인권 문제에 좀더 적극적인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 한미 공조를 유지하면서도 미국의 대북 압박 정책을 완화시킬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명분이 된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한국이 북한을 움직이겠다는 발상은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토끼다. 일단은 한미 공조라는 가까이 있는 토끼부터 잡아야 할 때다.
류길재ㆍ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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