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입양이 없었다면 저도 없었을 겁니다.”
최석춘(미국명 스티브 모리슨ㆍ50)씨는 꽤나 성공한 입양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우주항공연구소(Aerospace Corporation)에서 16년째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어린시절은 암흑이었다. 다리를 저는 장애, 술에 취한 아빠, 매맞는 엄마, 끼니 거르기 일쑤였던 가난…. 그의 삶에 입양이란 변화가 없었다면 지금 누리는 호사는 그저 한낱 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의 성공은 입양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10일 그를 만났다. 그는 6일 양어머니 마가렛 모리슨(82)씨와 함께 방한했다. 입양의 날(11일)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고, 무엇보다 침술로 양어머니의 무릎을 치료하고 싶어서다. 양어머니는 “침을 처음 맞는데 너무 시원하다”고 만족해 했다.
그는 입양 전과 입양 후의 삶을 구별해 설명했다. “입양 전엔 늘 배와 가슴이 고팠어요. 먹을 것도 부족했고 사랑도 부족했으니까요.”
강원 동해시 묵호역 굴다리 밑의 판잣집에서 살았던 그는 술에 찌든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장면을 보고 자랐다. 5세 때 어머니는 결국 가출하고 아버지는 경찰에 끌려갔다.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 1년 넘게 동냥 생활을 했다. 굴다리 밑에서 계란을 팔던 한 아주머니가 동생을 거뒀지만 장애 때문인지 자신은 보금자리를 찾지 못했다. 13세 때 흘러 흘러 온 곳이 홀트아동복지회였다.
나이가 많은 데다 장애까지 있어 입양은 쉽지 않았다. 1970년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생물학자인 존 모리슨(3월 사망)씨가 그를 입양했다. 그는 “입양 전엔 공부를 못했는데 가정이 생긴 뒤론 공부, 특히 수학에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79년 ‘달 사나이’ 닐 암스트롱을 배출한 퍼듀대 우주항공과를 졸업한 그는 미 항공우주국(NASA)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만큼 우주항공분야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내가 받은 축복을 나눠줘야겠다”는 생각에 2000년 12월 오해성(미국명 조지프ㆍ9)군을 입양했다. 99년엔 사단법인 한국입양홍보회도 설립했다.
그는 입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선 해외입양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이 있는데 입양은 사랑을 나눠주는 좋은 일입니다. 국내입양이 늘어나는 게 좋지만 그렇다고 해외입양을 막을 이유는 없지요. 그래서 저는 입양사실을 숨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가정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15일 출국한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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