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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1> 에드워드 윔퍼(184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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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1> 에드워드 윔퍼(1840~1911)

입력
2006.05.1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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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호른(4,477m)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 아니다. 심지어 알프스 지역으로만 국한해서 보더라도 마터호른보다 높은 산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지구 상에 어떤 산들이 존재하고 있는지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알프스가 ‘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 결코 오를 수 없는’ 산이 바로 마터호른이었다. 거의 예각 삼각형에 가까운 날카로운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다른 위성봉들을 거느리지 않고 있어 그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산이었다.

현대 등반사에서 단 하나의 이정표를 꼽아야 한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에드워드 윔퍼(1840~1911)의 마터호른 초등(1865년)이다. 이 기념비적 등반의 주인공이 당시 나이 불과 25세의 앳된 젊은이였다니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그는 여느 등반가와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등산을 일삼아온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20세 때 처음 이루어진 알프스 방문을 이렇게 회고한다. “영국의 어느 출판사가 내게 알프스의 명산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나는 등산이라곤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 산을 본 적도 없고 하물며 산에 오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 20세 때의 첫 여행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당시 그가 화가로서 참여했던 등반은 영국산악회가 이끌었던 알프스 몽펠부 원정이었다. 원정은 실패했지만 윔퍼는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 이로써 그가 맡았던 임무는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경계선 밖으로 뛰쳐나간다.

이듬해 화가로서가 아니라 산악인으로서 다시 한번 몽펠부에 도전하여 끝내 그 정상에 올라선 것이다. 당시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혀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흥분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제 그의 눈에는 ‘오르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는’ 운명의 산이 가득 들어찬다. 바로 마터호른이다.

윔퍼는 그 이후 5년 동안 마터호른에만 여덟 번의 도전장을 내민다. 말 그대로 청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이 산에 쏟아 부은 것이다. 그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다.

풍찬노숙과 끝없는 좌절의 나날들. 그럼에도 도저히 잠재울 수 없는 비이성적인 욕망과 열정. 어쩌면 청춘은 무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1865년 7월 14일, 기어코 마터호른의 정상에 올라서고야 만다. 세계 등반사는 물론이거니와 윔퍼 자신도 이 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윔퍼는 생애 최고의 영광과 가장 쓰라린 비극을 이 날 하루에 모두 맛본다.

당시 윔퍼 일행은 스위스의 회른리 능선을 통하여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가이드 장 앙투안느 카렐 일행은 이탈리아 능선을 통하여 오르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과 이탈리아가 마터호른 초등을 놓고 격돌하고 있었던 셈이다. 윔퍼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일행이 먼저 정상에 닿은 것은 간발의 차이였다. 카렐 일행은 그들이 정상에 오른 것을 보자 그만 발길을 되돌려 버렸다. 윔퍼는 그 사실을 가슴 아파했다. “나는 카렐이 지금 우리와 함께 정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카렐이야말로 제일 먼저 정상에 설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비극은 당일 하산 길에서 벌어진다. 윔퍼 일행들을 하나로 묶었던 자일이 낙석에 의하여 끊어지는 바람에 그들 중 4명이 1,200m 아래의 빙하까지 추락하여 사망한 것이다. 등반사에서 ‘마터호른의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이 사건의 후폭풍은 엄청났다. 사람들은 마터호른 초등을 찬양하기보다는 무모한 짓을 하여 사람을 4명이나 죽게 만들었다면서 윔퍼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윔퍼는 사고경위서를 제출하고 법정에 출두해야 했으며 판결과는 무관하게 끔찍한 여론재판에 시달려야 했다. 그 모든 과정들이 당시 25세의 앳된 청년에게는 몹시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윔퍼는 결국 불멸의 초등 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박수는커녕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받고 알프스라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만다.

이제 용암처럼 타올랐던 청춘은 가고 기나긴 여생이 그의 앞에 남아있다. 그는 남은 삶을 보낼 무대로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 눈을 돌린다. 이를테면 방랑자 겸 산악인으로서의 삶을 택한 것이다. 그는 남미의 안데스 산맥과 캐나다의 록키 산맥 그리고 그린란드를 탐험한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바라보자면 엄청난 선구자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그는 40세가 되던 해에 남미 에쿠아도르에 있는 침보라초(6,310m)를 초등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인류가 오른 최고봉으로 기록된다. 여행과 등반 도중 보게 되는 모든 것들을 세심하게 기록하기로 유명한 그는 ‘안데스 등반기’를 집필하여 영국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윔퍼는 뛰어난 산악인이자 세심한 예술가였으며 고독한 사나이였다. 그는 산에 오르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 이외의 세상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온 그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66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진다.

만년의 그가 자신이 묻힐 곳으로 선택한 곳은 역시 알프스였다. 칠순을 넘긴 그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곧추 들어 마터호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증언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람들이 혹시 윔퍼씨가 아니냐고 물어봐도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그는 71세가 되던 해에 알프스의 샤모니에서 눈을 감았다.

▲ 세계산악문학 베스트1 '알프스 등반기'

판화 넣은 도전의 서사시 '불멸의 저서'

산악문학을 거론하고 있는 모든 논문과 잡지와 인터넷 사이트에서 한결같이 ‘역사상 최고의 작품’이라고 꼽는 것이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영국 초판 1871년)다.

영국산악회의 의뢰를 받아 ‘등반 100년사’(1957)를 집필한 아놀드 런은 이 불멸의 저서에 대하여 “인간들이 산에 오르는 한 영원히 읽히리라”는 최고의 찬사를 붙였다. 실제로 이 책은 지난 130여년 간 전 세계의 숱한 나라에서 중판에 중판을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다.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세계산악문학사’을 집필한 미국의 산악인 로버트 베이츠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으로 ‘한 개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웅 서사시’라는 점을 꼽았다. 에드워드 윔퍼가 1860년부터 1865년까지 자신이 체험했던 알프스 방랑과 마터호른 도전기를 기록한 이 책은 19세기의 풍물지로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가 남긴 놀라울 만큼 섬세한 동판화들은 이후의 등반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도판이 되었다. 책 뒤에 부록의 형식으로 붙어 있는 5장의 알프스 지도 역시 윔퍼의 동판화 작품이다. 덕분에 이 책은 예술품으로서의 소장가치도 높아 초판의 경우 1,000만원 이상을 호가한다.

이 책은 1988년 김영도와 김창원의 공역으로 국내에도 출간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렵다. 사실 어렵사리 구해본다 해도 일반인들이 수월하게 읽기에는 결코 녹록치 않은 책이다. 이 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알프스 지도를 펼쳐놓고 하나 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는 것이 좋다. 머리가 지끈거릴 때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윔퍼의 아름다운 판화 작품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를 알프스의 험준한 품 안으로 안내해준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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