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유럽으로 장기 출장을 갔었다. 호텔 전화비가 너무 비싸 가족에게 안부전화를 할 때는 주로 공중전화를 이용했는데, 파리 브뤼셀 등 대도시의 중심가에서는 공중전화를 이용하기가 녹록치 않았다. 대개 오후 5시가 넘어 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뒤 어스름이 깔려오는 거리로 나가면, 공중전화 앞은 길게 늘어선 줄로 늘 만원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도 ‘용건만 간단히’가 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5분, 10분 통화는 예사여서 공중전화 한번 쓰려면 30분 이상 기다리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불평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신문을 읽거나 잡지를 뒤적이면서, 아니면 앞뒤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며 한가롭게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5년 전 미국 뉴욕에서 1년간 연수를 할 때도 외출을 하면 늘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뉴욕은 인구가 1,000만명에 육박하는 대도시이지만,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마다 공중전화가 설치돼 있어 무척 편리했다. 최근에 가본 서구의 거리 풍경도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휴대폰을 든 사람이 늘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거리에서 시민들의 주된 통화수단은 공중전화였다.
며칠 전 동네 전철역에서 전화를 하려고 보니 휴대폰을 깜빡 잊고 나왔다. 할 수 없이 공중전화를 찾았으나,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공중전화를 이용해본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실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공중전화가 사라지고 있다. 도심을 벗어나면 공중전화를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 돼버렸다. 1954년 처음 등장한 공중전화는 99년 56만대에서 지난해 26만대로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공중전화 매출도 98년 7,200억원에서 지난해 980억원으로 7년 새 8분의 1 수준으로 격감했다. 휴대폰 보급이 확산된 탓이다.
그런데 애물단지가 돼버린 공중전화가 요즘 다시 부활하고 있다. 공중전화를 환영하는 곳은 전국의 초ㆍ중ㆍ고교이다. 아이들의 휴대폰 중독에 따른 과소비와 학력 저하를 절감한 선생님들이 휴대폰 추방운동에 나선 것이다.
사립인 서울 K초등학교는 아이들의 휴대폰 소지를 금지하는 대신, 반마다 공중전화를 설치했다. 경기 K중학교는 지난해 3월 교칙을 바꿔 교내에서 휴대폰 사용을 금지했다. 학교는 대신 학생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수신자부담 공중전화를 여러 대 설치했고, 교무실 전화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KT도 최근 공중전화 개선을 위해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었다. 이용자가 계속 줄어드니 퇴출해야 한다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위치정보나 문자메시지 발송 등 새로운 서비스로 국민이 다시 찾는 공중전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공중전화를 경제논리에만 매달리지 않고 국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서비스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국민들의 통신비 지출은 세계 1위이다. 휴대폰 교체주기도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다. ‘디지털 강국’도 좋지만, 가계지출 대비 통신비 비중이 선진국의 3배를 웃도는 현상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공중전화의 부활 움직임이 통신 과소비를 막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고재학 기획취재팀장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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