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백억은 받아내야 돼. 일인당 오억은 받을 수 있어. 그 놈들이 한 짓 때문에….” 아버지 솔터의 말. 듣는 이는 첨단 생명공학의 힘을 빌어 원래 아들과 똑같이 찍어 낸 아들들 중 하나인 버나드. 이들에게 엄청난 문제가 생겼다.
21세기가 봉착한 ‘복제 인간’ 문제를 다룬 연극이 처음 상연된다. 극단 컬티즌의 ‘넘버’. 진짜와 가짜의 분간이 힘들어진, 혹은 무의미해진 복제의 시대를 어느 가족을 통해 체험한다. 실제 그 디스토피아로서의 가능성을 진저리 나도록 생생히 경험했던 한국인들에게 이 연극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어떤 복제 인간이 35세가 돼서야 자신이 복제된 사실을 알았다면?(그는 희곡에서 B2, 즉 버나드2로 표현된다) 그러나 실은 그도 복제된 20명 중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교통사고로 어머니와 함께 죽은 줄 알았던 진짜 아들(B1)이 살아 돌아오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자기 존재의 진실을 알게 된 B2는 아버지에게 다그친다. 잘 못 만들어진 버나드들이 20개이니 20 곱하기 5, 즉 백억은 받아낼 수 있다며 잔망스런 작태를 보인다.
연극은 현대과학이 과연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지, 회의에 가득찬 시선으로 묻는다. “널 복제한 거야. 어떤 미치광이 과학자 놈이 불법으로.”(솔터)“우린 그냥 우연히도 똑 같은 유전자를 갖게 된 것이고, 그래서 똑 같고도 똑 같아진거지.”(또 다른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안 B2)
그러나 인간 복제의 어두운 미래를 그린 영화 ‘아일랜드’도 아니고, 제한된 소극장에서 단 두 사람만이 출연하는 소극장 무대의 어법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해 낼 것인지….
원로 배우 이호재(65), 중견 배우 권해효(41)가 탄탄한 앙상블로 그 질문에 답한다. 가벼워지는 요즘의 우리 연극 풍토에서 배우의 힘을 보여주는 무대를 보여주리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는 버디다.
2002년 영국에서 초연 당시, 버나드로 분한 배우가 자신이 지금 연기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헷갈려 1주일 동안의 수정 작업에 들어갔을 정도로 배우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B1, B2는 물론 마이클이라는 또 다른 복제 인간까지 소화해 내야 하는 권해효의 각오가 예전 같지 않다.
그는 “여러 인간을 소화해 내야 하는 배우에게, 이 작품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며 “대학로에서 사라져 가는 긴 연극, 무게 있는 연극에 참여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아버지 역의 이호재는 “본격 SF 연극은 처음”이라며 “황우석 사태의 와중에 이 작품을 준비한 덕에 남다른 각오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국 연극이 너무 평이해지고 안이해져 가고 있다고 느껴오던 차에, 이 작품을 만나 항상 살아 있는 연극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 무대는 해롤드 핀터 등의 대가에 가려진 또 한 명의 영국인 여류 극작가 카릴 처칠의 작품이 처음 국내에 공개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가야금 독주를 계속 더빙해 환상적 분위기를 내는 장영규의 음악이 SF 연극과 어떻게 어우러질 지도 관심이다.
영국에서 주요 연극상을 석권했던 ‘넘버’는 가정의 달인 5월, 심각하게 바뀌어 가고 있는 가족의 의미를 새삼 곱씹어볼 계기다. 연출 이성열. 18일~6월4일 정미소. 화~금 오후 8시, 토ㆍ일 3시 6시. (02)765-5475
장병욱기자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