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그린햄 커먼(Greenham Common)의 여성평화캠프는 동서 냉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0년대 반핵평화운동의 성지로 유명하다. 잉글랜드 서남부의 거친 들판 히스랜드에 있는 그린햄 커먼 기지는 미국 전략공군이 쓰다가 70년대 철수했으나, 80년대 초 소련의 신형 핵무기에 맞서 중거리 핵미사일을 새로 배치하면서 안보논리와 반핵평화운동의 대치를 상징하는 곳이 됐다.
서유럽을 휩쓴 반대시위 속에 이 곳이 주목받은 것은 여성들이 기지 철조망 옆에 뜨개실로 얽은 텐트를 치고 노래하며 춤추는 이색 시위를 19년 간 계속한 때문이다.
● 비폭력 평화운동 지혜 배워야
그린햄 커먼에 여성들이 모인 동기는 이동식 핵미사일이 전시에 적 공격을 피해 기지주변 마을과 도시에 널리 산개하게 돼있어 주민 모두가 핵전쟁 위협에 노출된다는 인식이었다. 이에 따라 운동가보다 보통 여성이 많이 참여했고, 일과 자녀가 있는 서민 주부를 대신해 중산층 젊은 여성과 할머니들이 대거 나섰다. 이들은 82년 3만 명이 손을 맞잡고 130만평 넓이 기지를 에워싸는 장관을 연출, 비폭력 평화운동에 이정표를 세웠다.
이들도 때로 철조망을 뜯거나 출입구를 가로막다가 경찰과 충돌했다. 그러나 정부는 국제 언론이 늘 주목한 평화캠프를 끝내 해산시키지 못했다. 투쟁은 91년 미국 핵미사일 철수 뒤에도 이어졌고, 2000년 정부는 마침내 그린햄 평원을 주민들에게 넘겨 자연생태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린햄 커먼은 한가할 정도로 낭만적인 얘기일지 모르나 평택 미군기지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적대적 대치를 성찰하는데 쓸모 있을 듯하다. 결론부터 말해 평택 대추리에서 군경과 시위대 2만 명이 전쟁터를 방불하게 하는 유혈충돌에 이른 것부터 안타깝고, 정부와 사회를 가림 없이 입장이 다른 쪽을 서로 나라를 망치는 원수처럼 욕하는 것이 서글프다.
냉전시대 영국과 서유럽 사회의 핵 배치 갈등이 평택 기지 논란에 비해 결코 사소하지 않았던 사실에 비춰, 우리 사회는 시대착오적일 만치 강파른 대결논리와 과장된 적대의식에 사로잡힌 느낌이다. 찬반 양쪽 모두 지혜롭지도, 정직하지도 않다고 본다.
안보를 걱정하는 이들을 고려해 운동세력의 잘못부터 살핀다. 대미 군사동맹의 가치와 미군의 역할에 대한 이견과 논란은 어디에나 있고, 오랜 냉전적 사고에 젖은 우리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만큼 이들이 한반도 평화를 해친다며 미군 철수를 외치는 것을 무조건 친북 용공으로 몰거나 비애국적 망동으로 매도할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주장을 힘으로 관철하려는 행위는 법과 공권력으로 제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원칙에서 볼 때 운동세력이 폭력시위로 공권력에 맞선 것은 스스로 정당성의 기반을 허물어 반대투쟁을 이어갈 여지를 좁혔다. 특히 비무장 군인들과 맞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진압경찰과 부딪치는 것보다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다. 황당하게 ‘광주사태 재현’과 ‘제2 전남도청‘ 따위를 떠든 것은 여론으로부터 고립되기를 자청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정부와 사회의 대응은 그에 못지않게 강파를 뿐 아니라 교활한 면모까지 지녔다. 정부는 민ㆍ군 관계를 염려하는 척 하면서도 국방부를 전면에 내세웠고, 기지 주변 철조망을 설치한 뒤에도 군과 시위대가 직접 대치하는 양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미동맹과 진보세력에 대한 정부의 일관되지 못한 행보를 숨기는 동시에 군을 앞세워 여론의 지지를 넓히려는 계산이 엿보인다. 그러나 군은 오랜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시위 농민까지 도덕적으로 타락한 무리로 매도하는 어리석음을 드러냈다. 이렇게 큰 고비를 넘길지는 모르나 근본적 문제 해결에서 멀어질 것이 걱정이다.
● 강파른 적대와 위선 벗어나야
한층 개탄스러운 것은 평택 기지 반대는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면서도, 진짜 관심은 용산 미군기지 터 개발에 쏠린 듯한 보수세력의 위선적 행태다. 미군이 용산을 떠나면 큰 일 날 것처럼 떠들던 이들이 용산개발 혜택을 놓칠까 안달하면서 평택 시위농민을 나무라는 것이 우리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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