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를 해석하는 두 가지의 시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 약물 중독으로 요절한 낙서 화가 바스키아를 다룬 1996년의 영화 ‘바스키아’는 정적이 감도는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자란 유년의 바스키아로 도입부를 시작한다.
둘. 1998년 뉴욕 현대미술관 입구에서는 피카소가 생전에 즐겨 입던 줄무늬 셔츠와 샌들 차림을 하고 커다란 피카소 마스크를 뒤집어 쓴(‘모여라 꿈동산’인형을 생각하시라!) 배우가 미술관 방문객을 호객하는 쇼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 피카소 도슨트가 관객에게 구걸하는 시늉을 연기하려 하자, 미술관측에서는 그런 행동은 자제해달라고 요구했다. 피카소의 품위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기막힌 이벤트는 오늘날 세계 화단에서 가장 악동 같은 작품만 내놓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연출이었다.
임종 때 피카소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를 위해 축배를”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미 생전 아쉬울 것 없이 누리다 간 자의 유언치고는 욕심도 과하다는 생각이지만 어찌되었건 이 바람은 그의 사후에 현실이 되고 말았다.
만국의 미술계가 그의 이름을 내건 전시회를 개최했고, 피카소는 현대미술의 등가물처럼 간주되고 있는 분위기다. 그런 가운데 앞의 두 예는 현대 미술계에 미치는 죽은 자의 영향력을 해석하는 상이한 두 태도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첫번째 예는 신화화한 피카소가 세상에 수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 또는 난해한 현대미술에 대한 감상과 소통법이 선문답처럼 수행되는 걸로 인식하는 보통 사람의 인식을 드러낸다.
반면 두번째 예는 피카소라는 고유명사가 시장경제에서 상품으로 가공되는 현상을 마치 월트 디즈니의 캐릭터를 뒤집어쓴 배우가 소비자를 유혹하는 형식에 빗대 비꼬는 것일 게다.
피카소가 미술계와 문화계 일반에 포괄적인 지분을 갖는 것은 흔히 외부로부터의 영향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천재성을 제작의 밑천으로 삼았다는 신화화한 사실에 기인한다.
더불어 동료 화가 브라크와 함께 창시한 입체주의가 이후 현대미술의 지형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 때문이다. 여느 거장 예술가의 경우와는 달리, 시기별 작품 사이에 유기적 연관성보다 차별적 독립성이 강한 것도 그의 특징으로 거론된다.
예를 들어 곡예사와 우울한 빈자들의 모습으로 일관한 청색시대(1901~1904), 활기찬 채색으로 여성 누드에 몰두한 장밋빛 시대(1905~1907),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를 포함해 아프리카 민속품에서 조형언어를 빌려온 시기(1908~1909), 사물로부터 형체를 분리해 재조립한 분석적 입체주의(1909~1912)와 미술에서 최초의 콜라주를 등장시킨 종합적 입체주의(1912~1919)라는 혁명적 조형 방식을 제조한 시기 등으로 나뉜다.
그 후 ‘어머니와 아이’같은 고전적 주제로 보수적인 회귀를 한 바 있지만 1950년대 이르러 벨라스케스, 고야, 푸생, 마네처럼 그보다 앞선 미술사의 거장을 재해석한 연작을 내놓는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회화라는 장르적 굴레에 묶여있지 않고 대형 공공 조형물, 도자기, 그리고 열거 할 수 없이 많은 드로잉을 남겼다.
물론 이처럼 작품 간 유기성이 무시된, 해서 차기작의 예측이 곤란한 피카소의 독불장군식 제작 원칙을 놓고‘창작에 있어 진보를 거부’했다는 비판도 제기된 바 있다.
한편 피카소의 유명세는 위에 나열한 다작의 열정과 독창성보다는, 세속적 열정을 둘러싼 항간의 관심이 반영된 바가 크다. 평생 달고 다닌 염문이 마치 작위처럼 이해된 피카소의 여성 편력은 아마도 낭만적 예술가에 대한 일반의 호도된 판타지에 대한 강한 소구력 때문일 것이다.
그는 두 번의 결혼을 포함, 세 여자로부터 네 명의 자식을 얻었으나 그 밖에도 비공식 연애 비사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평가 존 버거는 피카소가 젊은 시절 남긴 수많은 맹인 그림이 다름 아닌 성병으로 실명할 것을 걱정한 화가 자신의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했다.
여든 둘의 피카소가 남긴 말은 이렇다. “그림은 나보다 힘이 세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게 한다.”사실 이처럼 멋들어진 명언은 오늘날 관객이 피카소보다 강하다는 그림 앞에 주저앉게 되는 빌미이기도 하다.
반이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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