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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버지께 올리는 사죄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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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버지께 올리는 사죄의 절

입력
2006.05.0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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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학생 소년이 있었다.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매일 걸어서 오갔다. 오 분 거리의 초등학교를 다니다 사십 분 가량 걸리는 곳으로 다니려니 조금은 고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를 오가는 길에는 반짝이는 거리와, 시장과, 상점들이 있었다. 새로운 길의 풍경에 푹 빠진 소년은 그래서 걷기의 고됨을 잊고 즐겁게 학교에 다녔다. 약 30년 쯤 전의 일이다.

● 이맘때 떠오르는 철없던 시절

집은 가난했다. 10남매의 장남인 아버지는 말단 공무원이었다. 두 분의 할머니와 아직 미혼인 삼촌 둘 그리고 소년을 포함한 네 남매, 이렇게 열 명 대가족의 가장이었다. 살림살이는 빠듯했고, 어려운 살림에 보태느라 소년의 어머니는 시골 농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막내 동생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이모가 농장의 관리를 맡겼기 때문이다. 소년도 겨울만 빼고는 농사일을 돕느라 세 계절의 주말을 그곳에서 나다시피 했다.

그런 소년에게 중학생 교복은 생애 최초의 새 옷이나 마찬가지였다. 늘 형의 것을 물려 입었기 때문이다. 그 도시에서 가장 인기없던 중학교에 배정을 받고서도 소년이 별달리 슬퍼하지 않은 것도 그 새 교복 때문인지 모른다. 그의 형은 다른 학교의 학생이었다. 교복만큼은 물려 입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의 한 상점에서 눈에 확 띄는 바지를 본다. 회색 골덴 바지였다. 좀 늦된 소년에게 옷의 유혹은 사건이었다. 새 교복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언감생심 새 바지라니! 하지만 소년은 그 옷을 꼭 입고 싶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떼를 썼다. 농사일에 지친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었다. 그래도 옷에서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걸 알았을까. 소년의 아버지가 제안을 했다. 좋은 성적을 얻으면, 그 바지를 사 주겠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내기를 받아들였다. 넷이서 칼잠을 자는 작은 방의 구석에서 소년은 죽어라 공부를 했다. 소년의 승리였다. 며칠 뒤 소년은 기분좋게 아버지와 집을 나섰다. 바로 전에 아버지가 만원짜리 한 장을 주머니에 넣는 모습도 보았다.

그 매장은 그 도시에서 가장 비싼 옷을 파는 곳이었다. 매장에 들어서기 무섭게 소년은 바지를 찾아 입었다. 근사했다.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아버지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진 난감한 그늘이라니. 불길한 예감에 소년은 그때야 가격표를 보았다. 만이천원. 신용카드는 구경조차 못 하던 시절, 소년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 눈물 흘렀던 아버지의 속마음

황급히 바지를 벗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고목처럼 서 있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끌고 매장을 나왔다. 속으로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는 더 그러했을 것이다. 소년의 둘러대는 거짓말이 얼마나 빤했겠는가.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다음에 더 좋은 것을 사 주마 했다. 변하지 않은 가난 때문에 그 약속은 지켜질 수 없었다.

소년은 아버지의 그날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는 그때의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세상 자식들의 불효에 엎드려 사죄의 절을 올리면서.

박철화 중앙대 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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