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대학로 극장가에서 열 살 이상의 아이들 보기가 힘들다. 고학년 아이들은 대부분 방과 후 학원에 가 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아동극’을 하는 극장의 객석은 비었다.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만든 ‘유아극’이 올라가는 극장들만 북적거린다. 유아원 단체복을 맞춰 입은 아기들이 스펀지를 두텁게 자른 보조방석을 깔고 키를 맞춰 객석을 채운다. 오늘날 대학로 어린이 연극의 현실이다.
본래 극장은 아이들이 역지사지의 원리를 배우고, 세계의 갈등에 대한 대응 방식을 학습하는 공간이자, 예술과 표현의 의미 작용을 익히는 장소였다. 때로 극중 주인공이 겪는 문제를 통해 아이들은 심리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얻고 감정을 정화하며, 의자 다섯 개가 만리장성이 되는 상상놀이를 통해 사물의 도구적 실용성 너머의 다른 가치들을 깨닫기도 한다.
어린이 연극만큼 한 사회의 예술적 수준의 척도가 되는 것이 또 있을까. 어린이 연극엔 필연적으로 언어를 넘어선 비언어적 요소들, 즉 빛과 소리, 색채와 질감, 마임과 춤 등 인간이 소통하기 위해 고안한 모든 예술적 수단들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값비싼 대관료 때문에 눈을 질끈 감고 낮엔 어린이 연극을, 밤엔 성인 대상의 연극을 올리는 극장들이 대학로에는 간혹 있다. 미적으로 잘 가공된 무대공간의 창조도, 교체가 부담스러운 세트도, 조명의 다양한 변화도 일체 사절인 현실은 차라리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남루한 무대가 아이들의 상상력을 외려 부추기기도 하는 모양이니, 연극의 역설적인 힘을 엉뚱한 데서 발견한다.)
5월은 어린이 연극이 특히 물량 공세를 하는 달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신데렐라’ ‘피터 팬’에서 ‘천하장사 반쪽이’ ‘똥벼락’ 등 어린이 연극의 레퍼토리가 국적을 갖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당을 나온 암탉’ ‘우당탕탕 할머니 방’(사진) 등 전통적인 극형식 도입의 강박을 벗고 다양하고 보편적인 창작물을 만나기까지는 또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했다.
이 5월, 신문 지면과 인터넷을 뒤져 어린이 연극의 공연 목록을 확인하고 극장과 객석 조건, 어린이 연극 전문 극단인지 옥석을 가려본 다음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가로 나가시기를 권한다. 지금은 다 자라 대학생이 된 제자가 말한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연극을 보러 갔던 기억 한 가지만으로도 나는 사랑 받았구나, 하고 힘을 얻어요.”
극장은 전 생애를 추동하는 힘을 얻는 장소이기도 하다.
극작ㆍ연극평론가 장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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