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ㆍ31). 이전 장편 3부작(일식, 달, 장송)에서 기발한 상상력과 능수능란한 의고체(擬古體) 문장을 무기로 집요하게 과거를 파고들던 이‘조숙한 천재’가 드디어 고개를 돌려 현대인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네 편의 단편(‘청수’‘다카세가와’‘추억’‘얼음덩어리’)으로 이루어진 그의 신작 소설집 ‘센티멘털’(양윤옥 옮김, 문학동네ㆍ9,500원)에서도 히라노는, 제한적 질료인 언어만으로 원하는 형상을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마술을 펼친다.
특히 ‘추억’에서는 두 쪽 분량의 단어를 장난감 블록처럼 여기저기 갖다 붙여 수많은 구절을 만드는 과정을 반복한다. 언뜻 단어들을 낱낱이 해체해 흩어 놓은 것 같은 이 생경한 퍼즐 속에는 그러나 기묘한 트릭이 숨어있다. ‘얼음 덩어리’에서도 히라노는 영화의 ‘교차 편집’과 비슷한 파격을 선보인다. 한 쪽(page)을 2개의 단(段ㆍcolumn)으로 나눈 다음,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10대 소년과 불륜에서 허우적거리는 30대 여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독립적으로 진행시킨다. 두 이야기는 각자의 인생에 입력된 함수의 궤적대로 쌍곡선을 그리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다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교차한다.
소설의 이 같은 화려한 외적 형식 안에는 바로 ‘존재와 인식’이라는 진중한 주제가 들어차 있다.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기에,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연상케 하는 연쇄적인 철학적 사유(‘청수’)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인식의 화살은 언제나 의도한 곳을 꿰뚫지 못하고 미끄러지고 만다.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는 찬사까지 받았던 히라노의 필력은 이 소설집에서도 매혹적인 빛을 발한다. 이제 갓 서른을 넘은 젊은 작가에게서,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 할 것 같은 탁월한 심리묘사(‘다카세가와’ ‘얼음덩어리’)가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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